동트면 설 곳이 없을 리베르탱들: <리베르떼> (Liberté, 2019)

2020. 1. 9. 18:33주목할 만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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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화 <리베르떼>는 한국영상자료원 KMDb‘2019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프로젝트에 선정된 작품 15편 중 하나입니다.

1. 이 아티클은 스포일러를 강하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영화가 담아낸 수위 높고 성적인 행위를 서술하는 내용이 있으므로 읽는 동안 불편할 수 있습니다.

영화 <리베르떼>는 알베르트 세라 감독이 독일 Volksbühne 극단과 함께 작업한 연극 공연을 극단 배우들과 다시 협업해 완성한 영화이며, 7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을 받아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작품이다. 시놉시스에 의하면, <리베르떼>의 시간적 배경은 대략 프랑스 대혁명 직전, 공간적 배경은 포츠담과 베를린 사이 어딘가, 그리고 전반적인 상황은 리베르탱(Libertins, 16세기 말과 17세기의 프랑스 자유사상가)인 등장인물들이 루이 16세의 청교도적인 궁정에서 제명된 이후 발첸 공작(Helmut Berger)’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여행 중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근데, 막상 영화를 보면 발첸 공작의 지지가 필요한 인물들은 이미 그 공작이 있는 숲에 도착해 있다. 아울러 알베르트 세라 감독은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를 과감히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노을이 지는 오프닝 시퀀스와 동트는 엔딩 시퀀스를 제외하면 인물들을 시종일관 어두운 숲속에 가둠으로써 누가 어떤 행위를 요구하고 집행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영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리베르떼>는 자유에 관한 영화다. 그렇지만, 보편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초반부에 반트 공작(Baptise Pinteaux)’은 발첸 공작에게 루이 15세를 시해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다미앵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집게와 끓는 기름으로 고문을 받으며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다미앵은 결국 거열형에 처하게 된다. 반트 공작은 타인의 고통을 관조하며 쾌락을 느끼는 사디즘적 취향이 있지만, 몸통이 절반으로 찢어졌음에도 여전히 의식이 있는 다미앵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발첸 공작에게 고백한다. 그런데 반트 공작은 본인과 달리 고통스러워하는 다미앵에 시선을 고정하며 이 상황을 즐기는 세련된 취향을 지닌 세 여성을 우연히 목격했다고 말하며 그런 여성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이 이야기가 영화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질문 하나를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질문은 바로 루이 16세의 청교도적인 궁정에서 제명된 이들이 자유사상을 위해 필요한 발첸 공작의 지지와 타인의 고통과 공포를 응시할 줄 아는 여성을 찾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다. 더군다나 낮에서 밤으로 바뀌기 전 한 남자는 뜬금없이 다른 남자들에게 지난번에 여자의 입에 대변을 배설했으니 이번에는 소변을 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Liberté’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Liberté’가 채도가 낮은 초록색 글씨로 삽입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국기는 파란색, 하얀색, 붉은색, 총 세 가지 색으로 이뤄져 있으며 파란색은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 중에서 자유를 상징한다. 근데, ‘Liberté’의 색깔을 파란색이 아니라 칙칙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채도가 낮은 초록색으로 설정했다는 것은 알베르트 세라 감독이 논할 자유가 감각이 시들어 기능하지 못할 정도로 부패한 자유임을 의미한다.

종종 익스트림 롱 숏을 활용했음에도 하이 앵글 숏이나 버즈 아아 뷰 숏을 일절 사용하지 않다 보니 <리베르떼>의 화면은 오로지 평면적이고, 그러다 보니 모든 요구와 집행의 메커니즘이 발생하는 숲은 폐쇄적인 인상을 남긴다. 또한, 모든 등장인물의 활동 범위가 이와 같은 폐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숲에 국한되어 행위가 이뤄지다 보니 연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해가 지고 밤이 되자 마차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인물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보이기 시작한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엄폐하고 있던 인물들의 시선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지기 시작하고, 좁은 공간에서 충돌한 시선들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프레임 안에 여러 성애 행위가 열거된다. 그런데,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은 <리베르떼>에서의 성애 행위는 외관상 프로이트가 정의한 사도마조히즘의 틀을 갖고 있는 대신, 아무도 성적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명 숲속에서 펼쳐지는 온갖 성행위는 사도마조히즘적 특징을 갖고 있으므로 인물들은 가학적인 성향과 피학적인 성향을 모두 지니고 있어야 하며, 특히 프로이트의 정의에 의해 그들은 자기 자신을 고통을 주는 자와 고통을 받는 자의 입장에 동일시해 성적 쾌감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만, 알베르트 세라 감독은 사도마조히즘의 틀을 영화 안에 끌어들이되 욕구 충족 및 쾌락을 그런 특성으로부터 단절 시켜 버렸다. 그로 인해, 숲속에서 목격할 수 있는 모든 행위는 인위적이고 어색하게 다가올 뿐만 아니라, 만약 이들이 성행위를 하며 표정 변화를 일으키더라도, 이는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감정이 신체 외부로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 아니라 궁정에서 생활했을 당시부터 반복적으로 해왔던 성행위의 결과가 기계적으로 표면에 드러난 것이다.

숲속에서 등장인물들이 행하는 성교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마담 드 뒤메발(Theodora Marcadé)이 엉덩이를 내밀자 나무 뒤에 숨어있던 남성들은 본인 성기를 바지 위로 혹은 직접 드러내어 쓰다듬기 시작한다. 둘째, ’마드모아젤 드 옌슬링(Iliana Zabeth)‘은 한 남성에게 발가벗은 채로 있을 테니 나무에 자신을 밧줄로 결박하고 자기 머리 위로 정액을 부어달라고 명령하자, 지목을 받은 남성은 바로 명령을 따른다. 이때 마드모아젤 드 옌슬링은 본인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즐기지 않고, 집행자 및 관람자의 위치에 서 있는 다른 남성들도 그저 이 상황을 응시할뿐더러 아무도 나체로 나무에 묶인 여성의 몸을 건들지 않는다. 셋째, ’마드모아젤 드 겔되벨(Laura Poulvet)‘이 시종에게 자기 엉덩이를 나뭇가지로 때려달라고 요구하자, 두 번째 사례처럼 시종은 거절하지 않고 채찍질을 시작한다. 마드모아젤 드 겔되벨은 분명 고통을 즐기고 있지 않지만 계속 시종에게 더 세게 때리라고 요구한다. 이것 또한 피학적인 쾌락을 느끼고 싶은 욕구에서 기안한 게 아니라 기계적인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다. 넷째, 한 남성은 발기가 되지 않자 날카로운 물체로 팔을 찌르며 본인 육체 위로 소변을 보는 마담 드 뒤메발과 다른 남성의 모습을 미동 없이 바라본다. 다섯째, 마담 드 뒤메발과 마차 안에 있는 테시스 백작(Marc Susini)‘은 그녀의 요구대로 그녀의 항문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나중에 부가적인 요구를 받자 그녀의 항문을 벌려 다시 얼굴을 파묻는다.

소개한 다섯 가지를 포함해 극 중에서 일어난 다른 성애 행위들도 비슷하게 진행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절대주의 왕제와 가톨릭계의 권위에 반발하고 신앙심에 대해 회의감을 보였던 리베르탱들이 기존 관습과 종교로부터 해방하자는 본말에 어긋나거나 변질된 사고와 행위를 버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권위와 관습에 반항적인 입장을 보였던 자유사상가들이 숲속에서 성교를 할 때 상위계급이 명령하면 하위계급이 집행하는 위계적인 절차를 반드시 밟았다는 점, 타인의 체액이나 배설물로 몸을 더럽히더라도 궁정에서 입었던 옷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 등이 이를 입증한다. 또한, 마담 드 뒤메발의 항문을 속이 보일 정도로 벌린 다음 거기에 얼굴을 묻어 자세를 유지하는 테시스 백작의 모습은 궁정에서 뛰쳐나온 리베르탱의 타락한 도덕과 굴욕 속에 빠진 명예를 드러낸다. 이뿐만 아니라 본인이 뒤에서 어떤 여성을 덮쳐서 토하게 만들고, 다른 남성이 그 여성이 뱉은 토사물을 입으로 받아먹어 대변으로 배설하는 장면을 묘화하면 아름다울 것이라는 후반부 마차 안에서 있었던 두 남성의 대화는 제명을 당하기 전까지 궁정에서 생활하며 경험한 추악하고 비천한 도덕이 몸에 배였음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이다. 엔딩 시퀀스에 도달하자 동트기 시작하는데 햇살이 비춘 숲의 모습은 오한을 일으킬 만큼 굉장히 황량하다. 이런 숲의 공기와 이미지는 비록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기 전에 도망친 리베르탱들이 아침이 되자 숲을 떠났는지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있는지 모르지만, 자유를 표방했음에도 절대주의 왕제의 도덕과 관습을 버리지 못한 이들은 프랑스 대혁명이 찾아오는 순간을 결국 함께하지 못할 것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들이 추구한 자유의 이상은 현실과 거리가 멀었을뿐더러 앞으로 이들이 당당히 설 곳이 존재하지 않다고 정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