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무리 그녀를 부정해도... <판타스틱 우먼>

2019. 9. 8. 19:00주목할 만한 시선

'성(性)'은 영어로 'sex'와 'gender', 두 가지로 표현된다. 대략적으로 전자는 생물학적인 특징과 기능으로 남자와 여자를 나눈다면, 후자는 사회적인 의미 혹은 정신적인 성에 따라 남성과 여성을 나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육체적인 성과 다른 정신적인 성을 가진 사람을 지칭한다. 이를 바탕으로 영화 <판타스틱 우먼>의 핵심 내용을 말하자면, 이 영화는 연인의 죽음 이후 사회의 성 관련 이분법적 사고와 멸시에 맞서 자신의 사랑과 존재를 지키기 위한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라는 여성의 고독한 싸움을 다룬다. 사회는 끊임없이 '성(性)'을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마리나를 평가하지만, 마리나는 여자로서의 존재와 삶을 지키기 위해 물러서지 않으려고 한다. <판타스틱 우먼>는 이와 같은 그녀의 고군분투를 조용히 따라다니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술적으로 승화하여 그녀의 의지를 역동적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그녀의 생일날 사랑하는 애인이 갑자기 죽었다. 그런데, 사회는 그녀의 존재를 죽이려고 한다.

낮에는 웨이트리스, 밤에는 재즈바 가수로 생계를 유지하는 마리나에게는 나이 차가 좀 있지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남자 친구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리예스)가 곁에 있었다. 그녀의 생일날 둘은 데이트를 하고 같이 잠을 청하던 중 오를란도는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연인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에 빠져 애도를 표할 겨를도 없는 와중에 사회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그녀의 존재에 총구를 겨눴다. 의사는 마리나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그녀를 경찰에 신고를 하고, 경찰은 그녀를 시신 확인도 없이 바로 용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남자 친구의 전처는 그녀에게 차를 내놓으라고 요구를 하고, 그의 아들은 무단 침입해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집에서 나가라고 협박을 한다. 심지어, 형사는 자신은 온갖 성범죄 사건을 담당했다는 말을 하면서 마리나가 성범죄자일 거라는 방향을 미리 잡아버린다. 이렇게 마리나는 위로는커녕 자신의 정체성을 강제로 부정하려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대응하기 위해 걷기 시작한다. 

그녀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걷자 사회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혐오하고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마리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죽은 애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구석진 자리에서라도 애도하기 위해 계속 걸어 다닌다. 거리를 계속 돌아다니는 그녀를 대놓고 혐오하는 사회는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리나에게 여성 정체성을 포기하라고 강요한다. 우선, 오를란도의 전처 소니아(아린네 쿠펜헤임)는 마리나에게 장례식 불참을 요구하면서 이 요구를 모성애 강조를 통해 정당화하려고 한다. 사실, 오를란도 유족은 세상으로부터 오를란가 트랜스젠더와 연애를 하고 동거를 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을 꺼려한다. 그래서 소니아는 뜬금없이 마리나에게 자신은 딸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통해 여성이 되기 위한 요건은 모성애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에는 트랜스젠더는 아이를 낳을 수 없기에 당연히 모성애를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이 전제로 달려 있다. 이를 통해, 소니아는 마리나를 멋대로 재단하고 애도가 일종의 권리인 마냥 그녀의 슬픔마저도 통제하려고 달려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형사는 폭력적인 시선으로 마리나의 신체를 바라봄으로써 간접적으로 그녀를 여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명한다. 형사는 오를란도의 시체에서 여러 상처와 멍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마리나의 몸에도 흔적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그녀에게 신체검사를 요청한다. 상체 검사만으로도 엄청난 성적 수치심을 겪을 수밖에 없지만 하체까지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검사관이 형사에게 잠깐 고개를 돌려달라고 요청하지만, 형사는 그럴 수 없다면서 마리나의 하체를 똑바로 쳐다본다. 형사의 시선은 사회에서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남자의 특성이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성(性)에 대한 편협한 사고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사회가 언행과 시선을 통해 간접적으로 마리나를 혐오해도 그녀가 풍파를 견뎌내자 결국은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려고 한다. 끝내 장례식장에 등장한 마리나가 탐탁지 않는 오를란도의 가족 구성원들은 범죄자를 쳐다보는 것처럼 모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쫓겨난 그녀를 납치해 차 안에서 테이프로 그녀의 얼굴을 칭칭 감으면서 '호모'와 '괴물'이라고 언어폭력을 가한다. 이렇게 마리나는 트랜스젠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은 애인을 애도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정체성을 타인에 의해 부정당하고,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자체만으로도 범죄 취급을 받으며 지쳐가는 듯해 보인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심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한 그녀가 성기(性器)로 자신의 존재와 정체를 판단하려는 사회의 이분법적 기준을 되물으며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가 그녀에게 뭐라고 해도 그녀는 깨닫는다, 투쟁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걸

사회의 멸시 속에서 마리나는 지속적으로 죽은 오를란도의 환영을 보게 되자 오를란도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찾아 나선다. 그녀는 오를란도가 남긴 키가 사우나 탈의실 키라는 것을 알고 사우나를 방문하여 그의 사물함을 열어본다. 그런데, 그녀 앞에 놓인 건 어두컴컴하게 텅 빈 사물함이었다. 사물함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그녀는 오랫동안 텅 빈 사물함을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깨닫는 듯한 눈빛을 보인다. 그녀의 눈빛에는 사회가 이분법적인 사고로 자신을 판단하고 편협한 시선으로 자신의 사랑을 삭제하려고 해도 여자로서 살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사랑이 세상에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직 투쟁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다시 오를란도 가족이 있는 화장터를 찾아가 그들이 강제로 빼앗은 오를란도와 자신의 개를 돌려달라고 강하게 요구를 한다. 오를란도 가족과 투쟁하기 위해 화장터에 찾아온 그녀는 죽은 애인의 환영과 작별 키스를 하며 비로소 그를 떠나보낸다.

긴 투쟁을 마치고 마리나는 정상적인 자신의 삶의 궤도에 재진입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 재즈 바에서 공연을 해왔던 그녀는 어느 날 밤 단독으로 오페라 공연을 한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에서 그녀의 고통이 예술적으로 승화된 흔적을 이곳저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이토록 아름답고 감미로운 그늘'이라는 가사에서 자신이 겪었던 고초를 그늘로 비유함으로써 앞으로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고상한 다짐을 살펴볼 수 있었다. 

마리나는 느닷없이 죽을 만큼의 고난을 겪기도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계속되어야 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여자로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에서 편협한 사고로 함부로 타인의 존재를 정의하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 권리를 박탈하려는 사회를 향한 예리한 비판도 찾아볼 수 있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마리나가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을 빈번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면 거울을 바라보며 스스로 반문해야 하는 사람이 그녀가 아닌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사실을 보복이 아닌 투쟁과 예술을 통해 깨닫게 해 준 마리나, 그녀야 말로 진정한 판타스틱 우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