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겸허한 사랑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2019. 9. 8. 10:00주목할 만한 시선

'물처럼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언어, 청록빛을 띤 겸허한 사랑을 완성하다'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어둡지만 청록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사랑을 이야기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사랑의 형태를 절대적인 형태를 갖고 있지 않는 물에 비유를 한다. 사랑은 물처럼 따로 모양이 없으므로 사랑의 모양은 사랑하는 대상이 '나'를 채움으로써 형성될 수 있거나 '나'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채움으로써 형성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가 그려내는 사랑이 아름답고 겸허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사랑에 국한되지 않은 생명체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물과 사랑만 절대적인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사랑의 전제는 언어이며 언어도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채 유동적으로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출발점은 '사랑'이 아닌 '언어'이어야 한다.    

교감으로서의 언어, 순수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완성하다

언어장애를 지닌 청소부 엘라이자(샐리 호킨스)와 온몸이 비늘로 덮인 괴생명체(더그 존스)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로 교감을 나눌 수 없고 소통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 비언어는 언어가 되어 장벽을 넘어서고 교감을 가능케 한다. 엘라이자와 괴생명체 사이에 투명한 유리창이 서로를 만질 수 없게 하더라도 둘은 서로의 손바닥을 맞대며 유리창 너머로 교감을 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며 서로에게 신뢰감을 형성해 나간다. 특히, 음성 언어의 소통에 의지하지 않는 엘라이자의 의사소통 방식에 주목하게 된다. 영화에 엘라이자가 버스 안 창문에 기대는 장면들이 유독 많다. 유심히 보면 그녀는 유리창 위를 구르는 물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따라가면서 헤아린다. 그녀로부터 우리는 언어의 형태가 어떻든 서로 접촉하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따라 움직이면서 느끼는 것이 진정한 교감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달걀'이 빠질 수 없다. 달걀을 통해 괴생명체가 엘라이자가 일상생활에서 시용하는 수화를 배우기도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 달걀은 소통의 도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인간과 종이 다른 생명체의 소통 가능성을 싱징한다. 달걀 껍데기를 벗긴다는 것은 인간과 괴생명체가 편견 혹은 편협한 사고라는 장애물을 이겨내고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나타내는 반면, 달걀 껍데기를 벗기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편견에 사로잡혀 괴생명체과의 소통을 거부한다는 점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괴생명체가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무시하고 오로지 연구를 위한 해부의 대상으로 여기는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가 있다. 이와 반대로, 엘라이자와 괴생명체는 달걀 껍데기 같은 현실을 깨고 나와 서로의 마음을 읽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를 채워주는 순수한 사랑을 하기 시작한다. 

연대로서의 언어, 차별의 시대에 저항하는 공동체의 사랑을 완성하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시간적 배경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자 차별이 극심했던 1960년대이다. 영화는 이런 시대상을 인물들의 사회적 위치와 사고에 녹여냄으로써 뚜렷한 선과 악의 대립 구조를 만들어냈다. 스트릭랜드는 차별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기에 여성은 오로지 욕망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백인 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스스럼없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다. 예를 들어, "저게 신의 형상으로 보이진 않잖아? 신은 나처럼 생겼지"라는 대사를 통해 스트릭랜드는 종교적 측면까지 백인 우월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엘라이자는 언어 장애를 갖고 있는 여성, 엘라이자의 친구 젤다(옥타비아 스펜서)는 흑인 여성, 그리고 엘라이자의 이웃 자일스(리차드 젠킨스)는 동성애자로 그들은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하위문화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괴생명체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연대를 하게 되었고, 그 연대는 차별이 극심한 시대에 물러서지 않는 저항의 언어로 탄생한다. 자신들과 종이 확연히 다르지만 같은 생명체로써 무한 경쟁과 성과주의 사회의 도구로 전락한 괴생명체를 위해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모은다. 이 과정에서 괴생명체가 자일스의 고양이를 잡아먹는 소통의 오류가 발생하기 하지만, 자일스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오류를 해결하고 참된 연대에 계속 동참한다. 게다가, 미국 연구소에 침입한 소련의 스파이 호프스테틀러 박사(마이클 스털버그)도 자신의 임무를 뒤로 미루고 괴생명체를 구출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연대하게 된다. 그들의 연대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에 저항하는 힘과 언어가 되는 동시에 공동체의 사랑을 이뤄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육체적 결합으로서의 언어: 냉소적인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사랑을 완성하다 

마지막으로 주시할 언어는 육체적 결합으로서의 언어다. 일반적으로, 인간과 비인간 혹은 인간과 괴생명체의 사랑을 다루는 영화들은 심정적인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사랑이나 관념적인 사랑에 그친다. 최근 작품으로는 엠마 왓슨이 출연한 <미녀와 야수>(2017)가 있다. 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정신적인 사랑이라는 전형성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괴생명체의 육체적 사랑까지 다룸으로써 기존의 한계를 타파한다. 엘라이자는 앞서 말했듯이 언어 장애를 가진 여성이라는 이유로, 괴생명체는 인간의 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둘 다 사회로부터 불완전한 존재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도 성적 욕구를 갖고 있는 평범한 존재다. 소통과 교감을 통해 가까워진 그들은 원래 하나의 몸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다가 서로가 그리워하던 다른 쪽을 육체적인 사랑을 통해 결합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영화적 환상은 끝까지 그들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정신과 육체를 모두 어우르는 사랑의 결실을 맺게 한다. 그런데, 이는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사랑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사랑의 묘약까지 나아간다. 21세기는 20세기처럼 여전히 차별 문제로 들끓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육체적 사랑이 서로의 차이를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이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있기에 그들의 사랑은 냉소적인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다양한 형태의 물방울처럼 언어의 형태를 한 가지로 단정 짓지 않음으로써 여러 모양의 사랑을 담아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랑들을 물의 색깔과 같이 청록빛으로 물들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청록빛이 감도는 사랑의 형태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대의 모양 무언지 알 수 없네. 내 곁엔 온통 그대뿐.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내 마음을 겸허하게 하네.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