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과 함께 혹은 유령이 되어 떠나는 여행: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해안가로의 여행> (Journey to the Shore, 2015) &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 (Ghost Walk, 2018)

2019. 9. 8. 18:35주목할 만한 시선

2015년에 제작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해안가로의 여행> (2015)2018년에 제작된 유은정 감독의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 (2018)유령여행이라는 소재를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영화 모두 삶과 죽음의 교차로를 거쳐 위로로 향해간다는 점에서 서로 많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최종 목적지가 위로인 여행인 두 영화의 전제는 두 가지 리얼리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의 리얼리티, 또 다른 하나는 망자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자의 리얼리티다. 살아가는 자로서는 당연히 삶의 영역만이 유일한 리얼리티이며 이외의 리얼리티는 환상으로 인식되겠지만, 망자 및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자로서는 죽음의 영역 또한 하나의 리얼리티다. <해안가로의 여행><밤의 문이 열린다>는 두 리얼리티를 이분법적인 구도로 그려내는 대신 공존하되 엇갈리게 놓는다. 두 리얼리티를 단순히 공존시키는 방식 대신 교차로처럼 엇갈리게 놓은 이유는 주인공의 운동성과 주체성을 강화하고, 이 두 가지 성질이 내면 치유에 기여하는 과정을 윤리적으로 그려내기 위함과 관련이 있다.

<해안가로의 여행>의 주인공 미즈키(후카츠 에리)’<밤의 문이 열린다>의 주인공 혜정(한해인)’은 각자의 이유로 무감각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미즈키3년 전 바다에서 갑자기 일어난 남편 유스케(아사노 타다노부)’의 실종 사건으로 자신만의 생활 리듬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원망과 같은 감정이 강하다 보니 오히려 상실감마저 증발한 시간을 보낸다. ‘혜정은 당장 먹고 사는 게 쉽지 않아 타인과 관계를 맺는 걸 기피할뿐더러 자신의 감정을 살펴보는 일마저도 마다한다. 근데, 아무리 창작자여도 감각이 무뎌진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쉽게 위로를 건넨다면, 타인의 개인 환경 및 현 상황을 무시했다는 측면에서 비윤리적으로 보일 위험이 크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유은정 감독은 삶과 죽음의 영역이 공존하는 상태를 교차로처럼 묘사하고, 주인공에게 이 길을 스스로 빠져나올 충분한 시간만 제공한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주인공 미즈키에게 삶과 죽음의 교차로를 죽은 남편 유스케와 함께 걸을 기회만 부여함으로써 못다 한 이야기를 하며 응어리진 감정을 해소하고 주체적으로 잃어버린 3년을 회복하도록 돕는다. 유은정 감독은 주인공 혜정이 시간을 역행하는 여정을 보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와 감정을 외면했던 과거의 시간을 만회할 수 있게 한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미즈키는 갑자기 집으로 돌아온 남편 유스케와 함께 마을 세 곳을 거쳐 종착지인 해안가로 간다. ‘미즈키는 죽은 남편과 함께 누가 산 자이고 죽은 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마을을 부유하듯이 돌아다니는데, 마을을 이동할 때마다 남편을 향한 미안함, 그리움, 원망, 후회 등이 엉킨 미즈키의 복잡한 심경이 급진적으로 증폭된다. 증폭된 감정은 잠깐 남편과의 심리적 거리감을 넓히지만, 곧바로 이는 잃어버린 3년을 극복하는 시발점 역할을 한다. ‘미즈키는 여행 중에 대화 참여자와 관찰자의 위치를 지속해서 오가는데, 대화 참여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생전에 남편과 못다 한 이야기를 할뿐더러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던 남편의 상황을 우회적으로 알게 된다. 관찰자의 위치에 오게 됐을 때 미즈키는 마을 사람에게 친절히 대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그리웠던 그의 눈빛과 내면을 자기 방식으로 시각화함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채우는 동시에 앞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될 근원을 마련한다.

<밤의 문이 열린다>에서 혜정은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걸 피하며 살아왔기에 외로움에 익숙한 줄 알았지만, 영문도 모른 채 유령이 되어 자기 목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당혹감, 좌절감, 그리고 고독감을 자각한다. 근데, 왔던 길을 반대로 걷고 있던 혜정은 자신처럼 유령이 된 어린아이 수양(감소현)’을 우연히 만난다. 유일하게 이 아이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반응해주자 혜정은 고마움을 느끼는 동시에, 관계 형성을 매몰차게 거절해 상대방에 입힌 과거를 반성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혜정은 자신이 유령임에도 계속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본인이 지나쳤던 사람의 삶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상황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 혜정에게 어두웠던 과거의 를 안아줄 시간이자 기회로 발전한다.

미즈키혜정모두 여행 끝에 위로를 받으며 새 출발을 한다. ‘미즈키3년 전 남편이 사망한 곳으로 추정된 바다에서 다시 한번 남편을 떠나보낸 뒤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한다. 이번 여행으로 남편을 영원히 떠나보냈지만, 그동안 쌓인 원망과 후회를 화해와 애틋함으로 전환했을뿐더러, 마을 세 곳을 여행하며 남편과 진정으로 작별할 마음가짐을 굳게 했으므로 이전과 다른 이별을 할 수 있었다. ‘혜정수양을 위해 세운 계획을 결국 실행하는 데 실패했지만, ‘혜정에게는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으로부터 느끼는 죄책감을 서서히 떨쳐내는데 충분했을 테다. ‘혜정이 새롭게 출발하는 리얼리티가 살아가는 자의 리얼리티인지 망자 및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자의 리얼리티인지는 열린 결말로 인해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스스로 굳게 닫았던 내면의 문을 열었기에 혜정이 삶의 영역으로 복귀했든 죽음의 영역으로 이동했든 상관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