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이 아닌 접촉으로 맺어진 유대 관계 <어느 가족>

2019. 9. 7. 18:00주목할 만한 시선

"10년 동안 생각해온 가족의 의미를 모두 담은 영화이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60세가 되기 전에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변화를 주고 싶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세 번째 살인> (2017)을 찍은 다음, <어느 가족> (2018)을 통해 가족의 의미에 관한 시선이 담긴 영화로 돌아왔다. <어느 가족>은 <아무도 모른다> (2004), <걸어도 걸어도> (2008),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 (2015), <태풍이 지나가고> (2016) 등 이전에 찍은 여러 전작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본인의 전작에서 각각 중요한 요소를 뽑아내 만든 단지 하나의 총체라고 절대로 규정지을 수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을 향한 깊어진 시선은 가족의 형태를 단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는 자신의 사고관과 결속되면서 가족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더 밀도 높은  물음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전작과 비교했을 때 <어느 가족>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개인과 가족을 바라보기 위한 거리를 좁히지만, 여전히 자신의 주관성이 가미되지 않도록 노력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동시에 관객들이 영화의 질문에 능동적으로 대답하도록 유도한다. 근데, 감독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가족>이 담고 있는 질문의 출발점은 '접촉'이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림책 '스위미'와 접촉

쇼타(죠 카이리)는 초등학교를 다녀야 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현재 처한 여건상 그러지 못한다. 대신, 쇼타는 집에서 그림책 '스위미'를 반복해서 읽고, 나중에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에게 '스위미'의 줄거리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스위미'는 그림책이지만 절대로 지나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그림책이 <어느 가족>의 출발선이자 핵심이라고 넌지시 알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의 대요는 스위미 여리 마리가 힘을 합쳐 대형 참치의 위협에 대항한다는 것이다.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의 연금, 좀도둑질, 막노동, 유사 성행위 등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여섯 사람은 사회로부터 버려진 개인이라는 점에서 스위미에 해당하는 반면, 대형 물고기는 가정폭력, 빈곤, 소외감 등에서 허덕이는 계층을 목격했지만 외면해 버리거나 오히려 그들을 아예 '보호'라는 테두리 밖으로 내보내려는 사회를 상징한다. 사회는 오사무, 노부요(안도 사쿠라), 아키(마츠오카 마유), 하츠에, 쇼타, 그리고 유리(사사키 미유)를 버렸지만, 그들은 외려 서로를 버리지 않고 하나가 되어 물러서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여섯 사람은 피 한 방울 조차 섞이지 않았지만,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다가 접촉하듯이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접촉하면서 동고동락하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 공동체는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생각하는 가족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어느 가족>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접촉이 존재한다. 할머니 하츠에가 유리의 야뇨증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해주기 위해 꾸준히 유리의 손을 잡아 소금을 뿌려주고, 노부요는 자신처럼 학대와 화상으로 상처 자국이 남은 유리의 팔을 어루만져준다. 이와 같은 접촉은 공감을 기점으로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데 다다른다. 근데,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사무와 노부요, 그리고 아키와 말 없는 남자(이케마츠 소스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접촉도 등한시 여기면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동안 육체적인 관계를 주로 간접적으로 보여줬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오사무와 노부요가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세상이 사회적 약자계층이 살아가기에 점차 피폐해지고 있지만 서로를 위로함으로써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의미할뿐더러 부부라는 관계가 오로지 법적으로만 인정되었을 때 형성될 수 있는지를 관객에게 질문한다. 

아키가 말 없는 남자 손님과 접촉을 하는 모습은 앞서 언급한 것과 다른 맥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연대의 측면에서 고려한다면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유사 성행위 업소가 공간의 특성상 할머니의 집과 동일시할 수 없을뿐더러 한 공간에 같이 있는 이유가 다르지만, 같은 사회적 약자로서 서로 상대방의 심정을 이해한다. 아키는 말 없는 남자 손님을 자신의 무릎에 눕혀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 그 남자 손님은 아키가 그동안 마음에 간직하다가 꺼내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준다. 이러한 접촉은 서로 각자 지니고 있는 내면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아키가 그를 조용히 자신의 품 안에 껴안주는 모습은 비록 사회가 가진 게 없는 자신들을 내버렸지만, 그들은 도리어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음으로써 실낱같은 희망을 살려내고 있다고 읽을 수 있다.

접촉에 의한 성장과 아이러니

"<어느 가족>은 가족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이면서, 아버지가 되려는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소년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접촉은 단순히 공감, 유대관계, 연대의식 등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의 성장으로 발전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은 쇼타다. 물론 쇼타가 성적 호기심이 왕성해지는 나이가 되면서 육체적인 발달도 보이지만, 어느 날 유리와 함께 구멍가게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할아버지에게 걸린 사건을 계기로 죄의식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줄 알게 된 쇼타는 내면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모든 일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하는 양면성을 담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할머니 하츠에의 죽음과 더불어 쇼타의 성장은 가족의 붕괴로 연결된다. 하지만, 가족의 붕괴는 다시 한번 역설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붕괴된 가족 덕분에 쇼타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성장하기 시작한다. 유리는 다시 친모의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간 노부요가 일깨워준 사랑의 의미 덕분에 유리는 친엄마가 자신에게 하는 언행의 의도를 분별할 줄 알게 된다. 게다가, 친엄마의 얼굴에 난 상처를 만지는 유리의 모습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접촉의 의미를 지각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노부요는 쇼타에게 친부모를 찾을 수 있는 단서들을 알려줌으로써, 그리고 오사무는 잠깐 재회한 쇼타에게 이제는 다시 아저씨로 돌아가겠다고 고백함으로써 결국에 부모 되기를 포기한다. 그러나, 몸집만 어른인 이들도 진정한 어른으로 한 단계 성장한다. 노부요는 쇼타를 놓아줌으로써 쇼타가 더 이상 사회의 울타리 밖에 머무르지 않고 안으로 향할 수 있도록 지지한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료타(아베 히로시)와 이미지가 약간 겹치는 오사무는 여전히 철없는 티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쇼타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되고 싶은 어른이 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고, 오사무는 쇼타에게 이름에 얽힌 진실을 밝히지 않는 대신 자신의 본명을 그대로 쓰게 내버려두는데, 이는 오사무가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를 갖게 되어 진정한 어른으로 한 걸음 전진했음을 나타낸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한 집에서 같이 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그렇게 가족이 되었다. 사회는 그들이 도둑질로 겨우 연명하면서 살았으므로 행복하지 않았다고 단정 짓지만, 그들은 서로를 버리지 않고 몸을 맞대면서 함께한 시간을 훔침으로써 혈연관계보다 진한 유대관계를 얻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오로지 돈 하나 때문에 같이 동고동락하는 공동체로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사랑, 미움, 애착심, 서운함 등이 뒤섞인 감정까지 공유하는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그래서, <어느 가족>은 접촉에서 출발해, 성장과 붕괴를 경유하고, 진정한 가족에 관한 물음이라는 종착점에 도착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대서사적인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