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혹적인 성장담이자 고백담, <델마>

2019. 9. 6. 09:00주목할 만한 시선

한국에서는 2016년에 개봉한 <라우더 댄 밤즈> (2015)로 알려진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던 인물이 결국 운명을 직면하게 된다는 기본적인 설정을 전제하에 하나의 독창적인 성장담이자 고백담을 다루는 <델마> (2017)로 돌아왔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유년 시절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한 여성이 자신의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갈등하고, 이를 바탕으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 느끼는 심리를 작가 스티븐 킹의 소설 '캐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주인공 델마(에일리 하보)는 타인에 의해 봉인되었던 자신의 본성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불안감과 죄의식을 느끼지만,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전환과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 덕분에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그녀를 둘러싼 각양각색의 메타포를 하나둘 해석하다 보면, <델마>가 미적으로 대단히 뛰어나면서도 이야기 측면에서도 굉장히 야심차고 인상적인 작품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와 그 후

델마는 몸과 마음이 의지만 있다면 하나가 되어 자신의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초능력을 인지하지 못했던 유년 시절 델마는 무의식적으로 그 능력을 발휘해 남동생을 꽁꽁 언 호수 아래에 가둬 죽인다. 아빠 트론드(헨릭 라파엘센)는 엄청난 충격에 빠져 전혀 경황없는 가운데, 델마가 할머니와 똑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영화는 강의를 듣고 있는 델마의 모습이 그려지는 초반부에서 트론드와 관객 모두에게 초월적인 힘을 지닌 델마가 과연 초능력자인지 아니면 악마인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교수는 수강생들에게 빛이 과연 파동인지 아니면 입자인지 질문을 던진 다음, 본인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빛을 파동이자 입자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델마를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규정할 수 있다는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오프닝 시퀀스를 미루어 본다면 트론드가 델마의 능력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악마로 규정지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동생을 죽인 델마를 사악한 존재라고 판단한 트론드는 사냥을 따라나선 델마를 흰 눈으로 뒤덮인 숲 속에서 죽이기로 결심했지만, 자신의 혈육이기에 죽이는 것을 포기한다. 대신, 아빠는 부인 우니(엘렌 도리트 페테르센)과 함께 델마에게 할머니의 존재를 아예 가르쳐주지 않을뿐더러, 엄격한 교육과 신앙심으로 통제함으로써 보수적인 아이로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철저한 통제하에 살아온 델마는 긴 세월이 흘러 생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생이 된 델마는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부모는 델마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었는지 등 물어볼 뿐만 아니라, 몇 시에 어떤 강의를 듣는지까지도 꿰뚫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고통이 무엇인지 배우고, 금욕적인 삶을 강조받았던 델마는 성인이 되어서도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을뿐더러, 육체적인 쾌락마저도 죄로 인식해버린 나머지 모든 면에서 사회와 동떨어진 개인으로 계속 살아간다. 하지만, 델마는 부모의 생각과 가치관이 항상 옳다고 받아들이는 인물은 아니다. 다른 사람처럼 델마 역시 쾌락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마음 한 켠에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있다. 다만 엄격한 통제 아래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죄의식의 굴레에 단단히 얽힌 델마는 욕망이 슬금슬금 피어오를 때마다 불안을 느껴 스스로를 부모가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알에 무의식적으로 가둬버린다.

 

점멸하는 불빛에서 드러나는 갈등

꽁꽁 언 호수 아래 헤엄치는 물고기의 시점에서 어린 델마를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와 수영장에서 잠영하다가 사방으로 갇힌 델마를 보여주는 후반부 장면은 그녀가 타자화되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격리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부모의 바람과 달리 모든 게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은 델마는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를 놓고 내적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갈등이 진행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이미지는 갑자기 부는 바람과 더불에 점멸하는 불빛의 이미지다. 델마는 파티에서 마리화나가 아닌 일반 담배를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억누르기 힘든 욕망을 상징하는 뱀이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즉, 델마는 자신이 아냐(카야 윌킨스)를 좋아하고, 그녀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처음에 델마는 본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부모가 가르쳐준 금욕적인 삶에 어긋나고, 사회는 아직까지도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가 발작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델마에게 동성을 좋아하는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초월적인 힘을 발휘해 아냐를 파편화된 유리 뒤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다.

델마는 의사로부터 자신이 요즘 겪는 발작이 심인성 비뇌전증 발작이라고 진단받는데, 그 의사는 여태껏 델마의 기억 속에 사라졌던 할머니가 그녀와 유전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델마는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혼자 찾아가 뵙는다. 델마가 거기서 목격할 수 있는 할머니의 모습은 비존재에 가까웠다. 할머니도 델마처럼 몸과 마음이 의지만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남편을 자기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아예 지워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요양원에서 사회로부터 단절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다시 말하자면, 델마의 할머니는 지신의 초능력에 대해 죄의식과 극심한 불안을 느낀 나머지, 자기 정체성 혹은 본성을 단념하고 말았다. 비록 델마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할머니가 어떤 선택을 내렸으며 그 이후 삶이 어떤지 눈으로 직접 확인했음에도, 불안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는 의사인 아빠 트론드에게 도움을 청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갈등 끝에 내린 델마의 선택, 그리고 드디어 깨진 알

집으로 돌아온 델마는 아버지가 건네는 지독한 약을 꾸준히 복용하면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씻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델마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녀가 이미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델마의 귀가는 그저 계속되는 불안에 의한 미봉책에 불과하다. 자신의 능력을 합리적인 이성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오로지 종교와 통제된 삶에 기대는 아빠에게서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한 델마는 초능력을 이용해 아빠를 호수 가운데에 배를 멈춘 다음 불에 타 죽게 만든다. 그리고 호수에서 잠영해 학교 수영장으로 이동한 델마는 되살린 아냐에게 달려가 포옹하고 키스를 함으로써 자신의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델마는 본인이 지닌 초능력이라는 본성 또한 인정하기로 결의한다. 그녀의 결심은 초능력이 이전과 달리 의식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델마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유리 파편 뒤로 사라진 아냐를 살려내고, 자신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다가 걷지 못하게 된 엄마를 치유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힘을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부정했던 부모의 판단이 그릇되었음을 증명한다.

호수 깊이 잠영하던 델마가 수면 위로 올라와 내뱉은 까만 새가 아빠 트론드라고 가정해 본다면, 그 장면은 그동안 이어졌던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갈등 끝에 전자를 선택했음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그리고 이를 삽입된 애벌레, 새, 뱀, 벌레 등 다양한 생명체들의 이미지가 뒷받침해준다. 방금 언급한 생명체들은 알을 깨고 나와야 세상의 빛을 바라볼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델마도 마찬가지다. 만약, 델마가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처럼 자신의 정체성과 본성을 부정해버리는 선택을 했다면, 영원히 집에 갇힌 그녀는 세상이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가능성을 아예 없애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델마는 과거의 역사에서 할머니가 내리신 선택과 정반대의 선택을 함으로써 이제야 자신을 억누르던 물리적인 영역과 종교적인 영역에서 해방되었다. 그렇게 델마는 세상에게 자신의 능력과 정체성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고,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자아를 단단히 형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