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잃은 사회를 다른 위치에서 봤는가 <주피터스 문>

2019. 9. 5. 09:00주목할 만한 시선

제70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은 <주피터스 문> (2017)은 <화이트 갓> (2014)으로 제67회 칸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과 '팜 도그상' 2관왕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게 된 헝가리 대표 감독 코르넬 문드럭초의 신작이다. <화이트 갓>에서는 생존을 위해 인간에 대항하는 유기견들의 모습을 다뤘다면, <주피터스 문>에서는 요즘 유럽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화두인 난민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테러리즘, 제노포비아, 거짓 약속이 되어가는 포퓰리즘 등 오늘날 세계를 들끓게 하는 사회 문제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주피터스 문>은 단순히 사회 문제를 현실적으로 그려낸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SF 판타지 장르를 선택한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은 360도 회전, 공중부양을 포함한 다양한 카메라 워크, 롱테이크, 핸드헬드 촬영 기법, 속도감 넘치는 카체이싱 장면 등을 활용함으로써 주제의식을 잡는 동시에 뛰어난 미장센을 구축하는 영화적 성취를 이뤄낸다. 유려한 장면이 담아내고 있는 사회문제를 하나하나 파악하고, 거기에 얽힌 믿음과 구원의 문제까지 고민한다면 <주피터스 문>은 체험적 영화이자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인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과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독보적인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수평에 갇힌 인간과 사회

"목성의 위성은 67개로 알려져 있다. 1610년 갈릴레이는 가장 큰 위성 4개를 발견했다. 그중 얼음 층 밑에 바다가 있다고 추정되는 위성은 새로운 생명의 발상지가 될 수도 있다. 그 위성의 이름은 유로파다."

'목성'의 위성 개수는 4대 위성 '이오', '가니메데', '플루스토', 그리고 '유로파'를 포함한 60개가 넘는 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지구'의 위성은 오직 달 하나뿐이다. 목성과 지구의 위성 개수 차이에서 드러나는 단순함은 인간의 편협함을 상징한다. 편협한 현대인은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믿고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야의 범위가 좁다. 이 모든 게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의 의도이자 시리아 난민 문제를 믿음의 관점에서 풀어내기 위함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에 덧붙여, 오프닝 시퀀스에서 확인할 수 있는 회색 연기로 자욱한 하늘, 닭장처럼 혼란스러운 상황, 그리고 핸드헬드 촬영기법으로 인해 계속 흔들리는 장면들은 참된 믿음이 점점 사라지는 디스토피아적 세상을 그려낸다. 아버지와 함께 시리아에서 유럽으로 탈출한 '아리안(솜버 예거)'은 계획과 달리 국경 수비대에 가로막히며 도망 다니기 시작한다. 경찰 '라슬로(기오르기 세르하미)'가 냉혈히 모든 난민을 쫓아다니며 총을 쏘는데, 그 이유는 모든 난민을 언젠가 자신과 유럽인들을 공격할 수도 있는 테러리스트라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하철 정거장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사건은 난민에 대한 현대인의 잘못된 인식과 혐오의 시선이 극명히 드러낸다. '아리안'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모든 사람을 따돌리고 지하철에 탑승했을 뿐인데, 경찰 당국은 제대로 수사를 시작도 하지 않고 테러를 일으킨 범인을 '아리안'과 그의 아버지라고 뉴스 미디어를 통해 공표한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지만, 술집에 있는 손님들은 TV 뉴스를 그저 바라보며 사실인 마냥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오성급 레스토랑 주인이나 고급 호텔 지배인은 '아리안'이 난민이라는 이유로 고객 대접은커녕 바깥으로 내보내야 하는 대상으로 취급한다.

이와 같은 모든 난민 문제 관련 장면들은 다문화사회가 도래한 현시대에서 더 이상 단일민족국가가 존립하는 게 어불성설이지만, 난민들이 자신의 사회에 편입하고 여러 세대가 지나면서 피가 섞이는 일을 원치 않은 현대인에게서 목격되는 제노포비아의 참상을 폭로한다. 근데, <주피터스 문>은 난민 문제와 테러리즘만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거짓 약속으로 전락하는 포퓰리즘을 지적한다. 시리아에서 탈출해 유럽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은 시리아인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고 있는 '스턴(메랍 니니트쩨)'은 의사라는 직업이 갖는 사회적 지위를 악용해 그들의 마음을 이용한다. '스턴'은 난민 수용소에서 검은돈을 받으면서 난민들을 빼내 준다. 물론, '라슬로'에게서도 포퓰리즘의 전형이 드러난다. 후반부 장면에서 '아리안'은 '스턴'과 함께 호텔 내부에서 진행 중인 파티장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무도회장을 즐기는 사람들과 '아리안' 간의 대조적인 외관을 통해 사회의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지식인들을 포함한 공권력을 가진 자들은 엄청난 대중의 인기를 받음으로써 이와 같은 수직적인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난민 체포와 관련된 소식을 매체를 통해 내보냄으로써 겉으로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노력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개인과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한 연극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음(陰)의 수직: '아리안'은 악마인가?

'라슬로'에 의해 부상을 당한 '아리안'은 중력을 거스르는 초월적인 힘을 갑자기 얻게 되었다. 이를 난민 수용소에서 두 눈으로 생생하게 확인한 '스턴'은 '아리안'을 아버지를 찾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감언이설로 꾀어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 데리고 다닌다. 겉으로는 '아리안'은 부패한 의사로부터 그저 이용당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왕진을 가는 '스턴'을 따라다니는 '아리안'의 첫인상은 그가 혐오와 차별로 가득 찬 사회에 희망을 안겨줄 천사가 아닌 오히려 더 추락시킬 악마의 이미지에 가깝다. 인간은 기발한 생각으로 신을 창조했지만, 정작 본인들의 눈 앞에 보이지 않자 믿음은 선험적 경험에 그칠뿐더러 자신의 죄를 죽기 전에 구원받고자 하는 소원이 이뤄지지 않자 좌절을 느낀다. '아리안'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믿음과 구원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아픈 환자 앞에서 자신의 초월적인 힘을 부적절하게 이용하는 일을 점차 즐기며 공모자가 된다. 하물며 '아리안'은 자신을 인종 차별하는 환자에게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신비한 능력을 복수의 수단으로 쓴다.

양(陽)의 수직: '아리안'은 천사인가?

그러나, '아리안'을 향한 판단은 어느 노부부를 만난 후 뒤집힌다. '아리안'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자 비로소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실'스턴'과 '아리안'이 노부부를 만나는 사건은 <주피터스 문>의 전환점이자 감독이 영화를 빌려 전달하고자 메시지에 본격적으로 다가가는 출발점이다. 노부부의 집을 구경하던 '스턴'은 노부가 만든 미니어처 마을 조형물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이는 그동안 세상을 오직 수평적으로 바라보고 살았던 삶에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간 과거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공간을 찾지 못했지만 혐오, 차별, 그리고 편견을 부술 진정한 믿음과 진리가 차츰 회복될 거라는 작은 희망을 내포한다.

근데, '스턴'도 마찬가지로 죄의식을 느끼는 계기를 맞이한다. '스턴'은 '아리안'이 그토록 재회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 소년을 이용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아리안'이 악마가 아닌 천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은 '스턴'이 '아리안'의 풀어진 신발 끈을 묶어주는 장면이다. 더 이상 '아리안'을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않고 탈출을 돕기로 결심한 '스턴'은 그전에 '아리안'의 운동화 끈이 풀려있음을 확인하자마자 무릎을 꿇고 끈을 묶어준다. 이때 '아리안'이 '스턴'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는다. 이것은 지난 과오로 인해 고통의 터널에서 탈출하지 못한 '스턴'에게도 구원이라는 기적이 일어날 것임을 뜻한다.

체포될 위기에 놓였던 '아리안'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턴' 덕분에 유리창을 부수고 결국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총구를 겨누던 '라슬로' 뿐만 아니라 길을 걷던 사람들, 그리고 운전하던 사람들 모두 마침내 위를 올려다본다. 영화의 엔딩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약간이라도 전환한다면,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잘못된 믿음 혹은 편견을 도려낸 다음 진정한 믿음과 진실로 다시 채워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수평적인 시각에서 수직적인 시각까지 갖춘 인간이 된다면 성찰을 통해 파멸의 낭떠러지에서 구사일생할뿐더러, 인간의 기발한 생각으로 창조된 신이 내린 벌을 더 이상 받지 않겠느냐는 희망도 엿볼 수 있다. 다만, 인간이 앞으로도 오로지 수평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편견, 혐오, 차별, 위선 등이 없는 이상적인 세계 '유로파'에 이륙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과거의 고통에 지배당하는 심신에 구원이 찾아오는 것은 오직 우리에게 달려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