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용서와 애도는 없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아이>

2019. 9. 4. 09:00주목할 만한 시선

2006년에 단편영화 <가희와 BH>를 연출한 신동석 감독은 올해 <살아남은 아이> (2017)를 통해 장편 데뷔를 했다. <살아남은 아이>는 작년에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영화평론가 협회상을, 그리고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장편상을 수상하면서 관객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더니 올해 제68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평단의 마음마저 사로잡은 작품이다. 신동석 감독은 이전에 한 세 번 정도 누군가의 죽음 이후 세상에 남겨진 자들의 삶을 이야기로 풀어냈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용서와 화해, 그리고 공감 능력과 애도를 둘러싼 윤리적인 고뇌를 세밀하면서도 굉장히 깊게 풀어냈다. 살아남은 아이가 있다는 의미는 살아남지 못한 아이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대단히 묵직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 인물의 감정과 관계가 형성한 견고한 삼각형을 처음부터 끝까지 균형을 잃지 않고 끌고 가는 세밀함은 세 인물의 감정 기복을 골고루 체화하게 만든다. 게다가, 감독은 단 한 번도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이 최대한 객관적인 위치에서 각 인물의 관점을 통찰하도록 유도한다.

각자의 강에 빠진 세 사람의 만남

<살아남은 아이>에서 장소의 이동은 수미상관을 형성한다. 성철(최무성)과 미숙(김여진)의 아들 은찬(이다윗)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강에서 시작해, 성철이 죽은 아들이 살려낸 아이 기현(성유빈)을 대면하게 되는 도로 위, 세 사람이 함께 얽히게 된 공사 현장과 인테리어 가게, 그리고 사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각자의 집을 경유함으로써 세 사람은 함께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강으로 돌아온다. 이는 세 사람이 은찬의 죽음 이후 고통, 슬픔, 죄의식, 애도 등 다양한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각자의 강에 빠져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이어간다는 느낌을 안겨준다. 더군다나, <살아남은 아이>에서 강은 격동하는 세 인물의 내면을 압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아내 미숙과 함께 인테리어 가게를 운영하는 성철은 도배, 장판, 새시 등 현장 작업을 담당한다. 성철에게 헌 벽지를 뜯어내고 벽에 새하얀 도배지를 바르는 작업은 죽은 아들의 무덤을 꾸며주는 일과 같다. 즉, 성철의 직업은 생전에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빈자리로 인한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여길 수 있다.

반면, 미숙은 아들을 상기하는 삶의 방식을 택한다. 죽은 아들의 친구를 불러 밥을 사주면서 은찬의 물건을 공유하려는 미숙의 행동은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와 나누고 하는 싶은 마음에서 기인한다. 성철에게 둘째를 갖고 싶어 하는 소원 또한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비록 미숙이 처음에는 남편이 기현을 만나고 심지어 일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못마땅했지만, 결국 기현을 받아들이는 것도 연장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다. 기현은 은찬의 죽음에 감춰진 비밀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진실을 처음부터 고백하지 않으려는 기현의 태도는 도배 작업에서 드러난다. 새로운 일을 배움으로써 기현은 자신이 지닌 죄의식을 덮으려고 한다. 하지만, 장소의 전환이 점점 이루어지면서 결국 기현은 홀로 진실을 털어놓는다. 예상치 못한 기현의 고백은 이렇게 세 사람이 각자의 강에서 하나의 강으로 합류하게 된다. 

완벽한 위로가 있을까? 온전한 용서가 있을까?

성철은 죽은 아들의 자리를 훌륭하게 닦아주기 위해 의사자 선정 작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할뿐더러, 아들의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설립까지 한다. 그 이후 성철과 미숙의 지인들은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은 되레 마음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 이와 같은 부족한 공감 능력은 성철과 미숙의 상이한 애도의 방식과 더불어 과연 어떤 위로가 완벽하고, 어떤 용서가 완전한지에 관한 질문으로 직결된다. 물론, 영화는 끝까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나, 엔딩 시퀀스는 질문에 관한 감독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엔딩 시퀀스는 완벽한 용서와 화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강에 빠진 세 사람이 허우적거리면서 서로를 구해내는 과정은 누군가를 위로해주거나 용서를 하려고 애쓰는 일 자체가 의미 있다고 말한다. 만약, 확실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위로와 애도가 있다고 결말을 지었다면, 인물의 관계와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미숙이 성철과 기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모습으로 영화를 끝맺음으로써, 완벽하지 않지만 의미 있는 노력이 있기에 그다음 단계로 전진할 수 있는 조그마한 희망을 안겨준다. 

'살아남은 아이'의 궁극적인 의미

사실 처음에 '살아남은 아이'라는 영화 제목은 일차원적인 느낌이 강하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아이는 소재적으로 죽은 아들 은찬이  살려낸 기현을 의미하는 동시에 스크린 안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시작점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제목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감독은 영화 제목을 빌려 누군가의 죽음 이후 어떻게 서든 살아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선택으로 어떤 달라진 삶을 살아가는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제목의 의미를 더 집중해서 들여다본다면, 비록 죽음은 주변에서 경험하기 이전까지는 본인과 지금 당장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각자 삶의 근방을 배회하는 무형의 존재라는 사실이 전제로 깔려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마도 인물의 감정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다니면서 어루만져주는 음악은 제목에 숨어있는 궁극적인 의미와 전제에 도달하기 위한 사색을 돕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