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물결에 일렁거리는 인간성 <죄 많은 소녀>: 자멸하는 감정, 자멸하는 인간, 그리고 자멸하는 사회

2019. 9. 3. 10:00주목할 만한 시선

'친구가 사라지고 모두가 나를 의심한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 세상에 남겨진 자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와 죄의식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영화는 대체로 용서와 애도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윤리적인 고민을 통찰한 후, 조그마한 희망의 싹이라도 틔우기 위해 여러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김의석 감독의 <죄 많은 소녀>는 상실감을 대처하는 어른과 청소년의 모습을 통해 희망은커녕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나약한 인간성을 들춰내는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자멸하는 인간과 사회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죄 많은 소녀>가 굉장히 날카롭고 충격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와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 등 유수 영화제에 초청받아 수상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가냘픈 인간성으로 인해 검은 물결로 물든 사회를 첨예하면서도 대단히 직선적으로 보여준 것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죄의식의 회피와 전가

인간은 죄의식의 영역에서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는 존재다. 죄의식이 발동하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인간이 어쩌면 가장 두려워하는 죄의식은 누군가의 상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상실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은 불행히도 결코 올바르지 않은 태도로 전환된다. 갑작스러운 경민(전소니)의 실종으로 인해 어른과 청소년 구분 없이 모두가 '세상'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를 못하고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다. 즉, 경민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아노미 상태에 빠진다. 어른들은 경민의 실종과 관련해서 사건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동급생을 조사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사람은 영희(전여빈)를 가해자로 몰고 간다. 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 원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일어난 난 것과 관련 있다. 더군다나,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누구나 한 번쯤 실수를 할 수 있다는 담임(서현우)의 말은 무조건 안전하다고 주장해온 세상이 무너지는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겁한 변명이자 심리적인 폭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어른들이 영희에게만 죄의식을 전가하는 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학생들이 어른들이 책임을 져야 할 죄의식까지 부담하고 있다. 영희의 친구 한솔(고원희)은 이중 부담이 된 죄의식이 주는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진실을 숨김으로써 자신의 살 길을 모색한다. 다솜(이봄)이나 유리(이태경)를 포함한 일부 학생들은 경민의 죽음이 본인과 연관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복수를 대신한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명분을 갖고 영희를 죽음의 벼랑 끝으로 밀어낸다. 이렇게 한 사람의 실종에서 기인한 죄의식의 압박감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삶을 붕괴시킬뿐더러 사회 전체를 무너뜨린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되는 점은 죄의식의 회피 및 전가의 또 다른 형태다. 경민의 엄마(서영화)는 딸의 실종을 둘러싼 진실을 알기 위해 영희의 뒤를 끝까지 따라다닌다. 이는 죄의식의 회피 및 전가가 생전에 자기 딸을 잘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잘해주지 못해 느끼는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기 위한 경민 엄마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죽음 후에...

학교 분위기가 경민의 실종 사건 이후 아주 혼란스러워지자 수학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심하게 요동치는 상황과 감정은 일시적이므로 일정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잊어버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감독은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수학 선생님의 말에 대해 냉소를 짓는다. <죄 많은 소녀>의 영어 제목은 'After My Death'다. 원제는 하나의 의미로만 해석할 수 있지만, 영어 제목은 두 가지 제목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 둔다. 첫 번째 '나의 죽음'은 경민의 죽음이고, 두 번째 '나의 죽음'은 영희의 죽음이다. 경민의 죽음은 본능처럼 자신의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기 위해 타인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는 나약한 인간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성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자멸하는지를 어두운 색감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곧 완성될 영희의 죽음은 나약한 인간과 사회가 검은 물결에 잠몰당하는 현상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온 영희의 존재는 부메랑이 되어 영희의 삶을 붕괴시킨 사람들을 역으로 압박하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걸 아는 듯이 행동했던 동급생들은 또 다른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하고, 그 죄의식마저 회피하기 위해 혹은 변명하기 위해 희생양을 잡아 영희 앞에 제물을 바치듯이 내놓는다. 더 나아가, 영희의 어두운 그림자는 경민의 엄마에게도 드리운다. 이렇게 어른과 학생 구분 없이 모두 철저하게 짓밟히고, 사회는 무너진다. 특히, 두 번째 '나의 죽음'은 붕괴된 인간과 사회에게 재건을 할 자격 조차 부여하지 않는다. 결국, '나의 죽음'은 누군가에 의해 계속 진행되는 하나의 현상이 되어버렸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매달리는 가냘픈 태도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그 현상은 이어질 게 명백하다.

정리하자면 <죄 많은 소녀>는 경민의 실종 사고의 원인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채 하나의 맥거핀처럼 역할을 수행하도록 놔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의식의 흔적 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 피하거나 타인에게 전가하는 행위와 소통을 명분으로 소통하는 척을 하는 모습을 고발한다. 이를 통해 만약 우리가 아노미 상태에 빠진 사회를 여전히 응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필사적으로 아등바등 애를 써도 검은 물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중에는 어두운 물속에 잠기게 된다는 메시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