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진을 위해 과거와 인사하는, <누에치던 방>

2019. 7. 14. 00:27주목할 만한 시선

<누에치던 방>을 2016년에 열렸던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처음 관람했다. 당시 이 영화는 '현재'와 '과거' 두 시제가 조각의 형태가 되어 서로 개입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어렵지만 동시에 신선하게 다가왔다. 전반적으로 채도가 낮은 이 영화는 '잠실'을 배경으로 삼아 인간의 기억과 관계를 이야기한다. 지금 잠실은 최신식 건물들이 건축됨으로써 굉장히 현대적인 느낌을 갖고 있지만, 잠실 어딘가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쓸쓸하고 공허한 공기만 계속되어 축적되고 있다. 오랫동안 축적된 그 공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잊고 있거나 외면하려고 애쓰던 과거를 회상해야만 했다. 이를 이완민 감독은 '현실'과 '비현실'을 개연성 없이 번갈아 가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누에치던 방>은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 구조 때문에 공감하기에는 벽이 높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세한 변화를 보이는 인물들과 희망이 엿보이는 옅은 미소에 초점을 둔다면 <누에치던 방>은 고된 삶으로 지친 현대인에게 위안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라진 존재의 자리에 '미희'의 등장, 그리고 현재에 되살아나는 파편화된 과거

10년째 사법고시생으로 살던 미희(이상희)는 우연히 지하철에서 마주친 어떤 여학생(김새벽)을 따라 잠실나루 역에서 하차한다. 미희는 여학생의 뒤를 따라가던 중 성숙(홍승이)의 집 문을 두드렸고 그녀에게 다짜고짜 고등학교 단짝 친구라고 주장한다. 그 순간 미희는 성숙의 친구이자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인 유영(김새벽)의 자리를 메꾸게 된다. 미희의 등장은 하나의 파동이 되어 유영의 죽음 이후 상실감과 공허감에 사로 잡혀 살아오던 성숙과 익주(임형국)가 어딘가에 처박힌 과거를 조각의 형태로 소환하게 만든다. 성숙은 처음 본 미희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반면, 익주는 일면식도 없는 미희의 방문에 불쾌함을 표출하지만 그녀에게 호기심을 보인다. 두 사람은 미희를 향해 다른 반응을 보이지만 유영과 함께 했었던 청소년 시기를 동시에 회상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공허하게 삶을 살아오게 된 순간을 목격하며 끊임없이 과거를 현재에 머무르게 한다. 물론, 미희 본인도 고시 공부 때문에 그동안 단절했던 과거를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예전의 '나'를 찾아다니는 동시에 현재의 '나'를 찾기 시작한다. 

누에고치에 갇힌 삶에서 감지되는 변화, 그러나 엉킨 실타래에 여전히 묶여 있는 세 사람

미희가 잠실에 등장한 이후 세 사람의 삶에는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유년 시절을 제외하면 딱히 친구 관계를 맺지 못했던 성숙은 어른이 되어 오래간만에 친구라는 관계를 맺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를 안고 있지만 함께 있을 때만큼은 오래된 친구처럼 말을 편하게 하고 솔직한 대화를 하려고 한다. 익주는 첫인상이 좋지 않은 미희를 쫓아가 그녀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 이후 그는 무뚝뚝한 표정 속에 숨겨진 자신의 여린 측면을 그녀에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가 자신의 나약함을 미희에게 보여주는 이유는 타인과의 소통을 갈구하는 마음이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미희는 고시 공부 때문에 연락하지 않았던 대학교 선배(김승현)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택 때문에 절교한 고등학교 단짝 친구 근경(정원)을 만나 오해를 풀고 사과를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엉클어진 과거의 상처와 실패에 발이 묶여 있다. 성숙은 사회가 부여한 기준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숨기는 사람들에게 싫증이 난다. 왜냐하면 사회가 결코 올바른 시스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유년 시절의 자신을 억압하게 만든 과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익주도 성숙과 비슷한 이유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걸 혐오하면서도 죽은 유영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미희 때문에 과거의 상실감이 날카롭게 자신의 마음을 후벼 여전히 괴로움과 무력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미희는 잃어버린 10년을 거슬러 자신의 관심사, 꿈, 그리고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복기하려고 하지만 유년 시절 자신의 행복을 억압하려고 달려들던 부모님이 현재에도 억압하고 간섭하려고 하자 마음의 병이 도져 분노한다. 

소환했던 과거에게 인사를 건네는 세 사람, 그리고 새 출발

익주, 미희, 성숙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온 과거에게 인사를 건넨다. 우선, 익주는 오랜 기간 같이 집에 살던 성숙을 떠나보낸다. 성숙이 익주에게 이제 집을 떠나야겠다고 하자 익주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을뿐더러 슬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공연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벽에서 다 떼고 새로운 포스터를 수십 장 찍어냄으로써 멀리서도 그녀의 현재 삶을 응원하겠다는 그의 다짐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성숙과 미희는 같이 과거의 친구를 만나러 간다. 성숙은 미희에게 자신의 진짜 단짝 친구 유영이가 묻힌 묘에 데려가 그녀와 인사하게 도와주고, 미희는 근경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 성숙을 데리고 간다. 다만, 미희가 과거에게 건네는 인사는 좋게 끝을 매듭짓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타인의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종종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진행되는 현실이 표현되었을 뿐이다. 세 사람이 각자의 과거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마음 가는 대로 행동을 했고, 과거의 상처와 모멸감에 짓눌려 살아오던 그들이 과거를 직면함으로써 일종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비로소 삶에서 정지가 아닌 전진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세 사람은 어떻게 현실을 살아갈 것인가? 과거는 단순히 현재와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개입하기 때문에 그들은 상처의 역사로부터 영원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은 주변 사람과 자신을 혐오하고, 무력하고, 냉소적인 삶을 살지 않을 거라는 희망이 있다. 게다가, 그들이 돌아다니는 잠실도 삶에 대한 사랑과 새로운 관계의 발견을 통해 점차 채도가 높은 색깔로 칠해질 거라는 희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희망이 있기에 <누에치던 방>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따뜻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