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난 원과 둥근 사각형에게 바치는 송가: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2019. 7. 18. 16:11주목할 만한 시선

제71회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을 받았던 질 를르슈 감독의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2018)은 다채로운 걱정을 갖고 수영장으로 나서게 된 중년 남성들의 도전기를 다루는, 즉 익숙한 플롯을 따르는 영화다. 그러나, <수영장으로 나서게 된 중년 남성들의 도전기를 다루는, 즉 익숙한 플롯을 따르는 영화다. 그러나,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뻔한 클리셰도 유명한 배우들의 조합뿐만 아니라 클로즈업 숏, 수평 트래킹 숏, 버즈 아이 뷰 숏, 트랙 인 및 아웃 기법에 의한 숏 등 적재적소에 촬영 방법에 변화를 준다면 매력적인 맛으로 재탄생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영화다. 무엇보다 동적인 숏들은 지속적으로 축적되면서 연기 앙상블 이외 또 다른 앙상블을 이뤄낸다. 

배우들의 연기에 의한 청각적인 앙상블보다 촬영 기법에 의한 시각적인 앙상블이 어떤 영화보다 두드러졌던 이유는 심리적 위기를 겪으며 자아를 상실할 위험에 처한 인물들에게서 드러나는 운동성 때문이다. 트랙 인과 아웃으로 완성한 숏과 클로즈업 숏의 경우 수중 발레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인물들이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해 어설프지만 열심히 개인 연습하는 모습을 담아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 버즈 아이 뷰 숏과 수평 트래킹 숏은 8명의 중년 남성들이 수중에서 합을 맞출 때 일어나는 무질서를 보여주는데 중점을 둔다. 

얼핏 보면 원기둥이 사각기둥에, 사각기둥이 원기둥에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독립적으로 볼 때 전자의 경우가 나타낸 열정과 후자의 경우가 묘사한 무질서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두 가지 경우의 숏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충돌하면서 내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며 둥근 원기둥은 모난 원기둥이 되어 사각기둥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고, 각이 진 사각기둥은 곡선을 갖게 되면서 원기둥을 비로소 지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인물들의 도전기에 투영하자면, 이들은 도전 중에 우여곡절을 거치기는 했지만, 마침내 무질서 속 환하면서 견고한 조화를 형성해낸다.

결국,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모난 원과 둥근 사각형과 같은 인물들에게 헌정하는 송가와 다름없다. 영화는 주변 사람이 계속 자신을 함부로 실패자라고 불러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꿈을 향해 도전에 임했으므로 이들은 하늘 위를 바라보고, 음악을 즐기고, 그리고 빛을 느낄 수 있는 권리를 누구보다 더 당당하게 누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혹은 이 영화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기도서'에서 '나에게 너무 하찮은 것은 없으며 설사 하찮은 것을 사랑하여 / 그 하찮은 것을 황금빛 화판에 크게 / 높이 지켜준다, 그리고 나는 알지 못한다, / 그 작은 것이 누구의 영혼을 풀어줄지...'라는 한 연처럼 사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차별적인 시선과 태도 없이 대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전수(Vollzähligkeit)'가 적용된 게 아닐까 싶다.

Da neigt sich die Stunde und rührt mich an 
mit klarem, metallenem Schlag: 
mir zittern die Sinne. Ich fühle: ich kann - 
und ich fasse den plastischen Tag. 

Nichts war noch vollendet, eh ich es erschaut, 
ein jedes Werden stand still. 
Meine Blicke sind reif, und wie eine Braut
kommt jedem das Ding, das er will. 

Nichts ist mir zu klein und ich lieb es trotzdem 
und mal es auf Goldgrund und groß 
und halte es hoch, und ich weiß nicht wem 
löst es die Seele los... 

이제 여기 시간이 기울면서
맑고 금속성을 띤 울림으로 나를 툭 친다,
그리고 내 감각이 바르르 떨려온다. 나는 느낀다, 나는 할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조형의 날을 움켜쥔다.

내가 바라보기 전에는 완성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생성은 멈춰 있었다.
이제 내 눈길은 무르익어 마치 신부처럼
바라보는 눈길에 사물들이 다가온다, 눈길을 원하는 사물들이.

나에게 너무 하찮은 것은 없으며 설사 하찮은 것을 사랑하여
그 하찮은 것을 황금빛 화판에 크게
높이 지켜준다, 그리고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작은 것이 누구의 영혼을 풀어줄지...

- Rainer Maria Rilke(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Das Stunden-Buch(기도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