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싶었던 그녀의 이야기 <아이, 토냐>

2019. 9. 11. 19:00주목할 만한 시선

1990년대 미국 피겨 스케이팅은 토냐 하딩과 낸시 캐리건의 라이벌 구도에 떠오르는 별 미셸 콴의 등장으로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 출전권을 따기 위한 전미 선수권 대회에서 '낸시 캐리건 폭행 사건'이 발생했는데 토냐 하딩이 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미국 전역뿐만 아니라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아이, 토냐>는 토냐 하딩의 시점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미국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 토냐 하딩의 삶을 미화하고 옹호하기 위함이 아닌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영화는 실제 인물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각자의 관점에 따라 변질되는 진실 조각들을 모아 토냐 하딩의 삶을 조명한다. 그러므로, 관객은 영화 자체가 판단하는 토냐 하딩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녀의 삶을 판단하게 된다. 과연 토냐 하딩은 은반 위의 악녀인지 사랑받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실패한 신데렐라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있다. 

트리플 악셀로 정점을 찍고 바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건 온전히 그녀의 잘못인가?

"I was loved for a minute, then I was hated. Then I was just a punch line."

세 살 때 스케이팅을 배우기 시작한 토냐 하딩(마고 로비)은 어린 나이에 피겨 스케이팅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보수적인 음악과 아름다운 의상을 강조했던 당시 피겨 스케이팅의 분위기와 동떨어진 곡 선정과 의상 문제 때문에 토냐는 빈번히 대회에서 자신이 보여준 기술에 비해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에 열 받은 토냐는 트리플 악셀을 연마하기 시작했고 이 기술로 세상을 열광하게 만들며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소에 거친 언행으로 말이 많았던 그녀는 트리플 악셀로 정점을 찍었지만 동시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건 토냐 그녀에게만 책임을 지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 토냐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악착같이 피겨 스케이팅을 했고 정상에 올랐지만 정상에서 즐기는 법을 몰랐는데, 그 원인은 토냐의 손발을 폭력의 사슬로 묶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우선, 토냐를 폭력의 수렁으로 끌고 간 사람은 토냐의 엄마 라보나(앨리슨 제니)다. 라보나는 토냐에게 항상 칭찬 한 마디 없이 욕설과 폭력으로 딸을 코너로 몰아 대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집에 돌아온 딸에게 격려는커녕 악담을 하다 딸에게 칼을 던져 팔에 부상을 입히기도 한다. 라보나는 딸이 챔피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했다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 그녀의 머리는 자신이 딸에게 투자한 돈이 미래에 큰 이익으로 창출되기를 바라는 보상심리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라보나는 성공에 눈이 멀어 딸을 학대한 괴물이었고, 그 괴물은 또 다른 괴물을 키워버렸다. 

또 다른 주변 사람은 토냐의 남자 친구 제프(세바스찬 스탠)와 션(폴 워터 하우저)이다. 토냐가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댄 사람이 제프였지만, 그도 연애 초반을 제외한 나머지 세월 동안 라보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피겨 스케이팅에 집중해야 하는 토냐에게 힘을 실어 주지 못할 망정 자신의 폭력에 지친 토냐가 도망치려고 하자 스토커처럼 따라붙기도 하고 때로는 총으로 위협하며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1994년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토냐가 협박 편지를 받자 이미 그녀와 이혼한 제프는 그녀를 위해 복수를 시도했다가 오히려 일을 더 꼬이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버렸다. 션은 제프의 친구로 성인이 되어서도 백수 생활에 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이것저것 먹느라 바쁜 인물이다. 근데, 제프의 복수 계획에 참여한 션은 자기 마음대로 폭주를 하더니 협박만 하기로 했던 원래 계획과 달리 다른 사람을 시켜 낸시 캐리건을 다치게 해버린다. 션은 사과할 마음도 없었고 오히려 제프를 배신하려고 시도한다. 게다가, 자신이 대테러 전문가라는 환상에 갇혀 사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을 논리 없이 정당화하는 뻔뻔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에게 가해진 언어와 신체 폭력이 정상에 올라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한 당연한 길이라고 여겼던 토냐도 폭력성에 깃들게 되어 스스로를 갉아먹긴 했지만 자신의 성공, 사랑, 자존심에 눈이 먼 세 사람은 토냐에게 폭력적인 환경을 조성했고 그녀에게 족쇄를 채워 절대로 풀어주지 않았다. 

대중은 그녀의 몰락과 무관한가?

"It was like being abused all over again. Only this time it was by you. All of you. You're all my attackers too."

그런데, 이 영화는 토냐를 학대한 주체의 범위를 대중으로까지 확대한다. 대중들은 쉽게 공인을 평가한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공인을 좋게 평가하기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트집이 잡히면 비판이 아닌 선을 넘은 비난 공격을 자행한다. 토냐도 이러한 대중들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다.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었던 토냐는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들이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녀가 트리플 악셀을 각종 무대에서 성공할 때마다 관중들은 그녀를 향해 환호했지만, 겨우 20대 초반인 그녀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대중들은 진심 어린 비판이 아닌 힐책하고 '악녀'라고 평가하느라 바빴다. 그러한 데다가, 토냐가 엄마한테서 폭력을 당하고 제프에게 총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어도 주변 사람들은 마주치기를 꺼려하거나 어떤 조치도 절대로 취하지 않고 쉬쉬하기만 했다. 더 나아가, 심사위원들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고려해 보면, 세상이 얼마나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에만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얌전하지 않고 거친 이미지인 토냐가 아무리 좋은 기술을 보여줘도 얌전하고 여성스럽지 않은 음악과 의상으로 대회에 출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심사위원들은 그녀에게 낮은 점수를 매겼고, 이는 대중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대중들은 한 사람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따라줄 것을 강요했고 충분히 그 사람을 소비한 뒤 매정하게 갖다 버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녀의 몰락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생은 포기하기엔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낸시 캐리건 폭행 사건'으로 연맹에서 영구 제명된 토냐는 더 이상 피겨 스케이팅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사회가 '악녀'라는 낙인을 자신의 이마에 찍을 때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생은 포기하기엔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라고 한 토냐는 1996년에 숀 대쉬 감독의 <브레이커웨이>라는 작품에 조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으며 2003년에는 프로복싱에 입문했다. 이외 활동으로는 각종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험도 있고 카레이서로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녀가 진짜 악녀인지 그저 거친 이미지와 언행이 만들어낸 '악녀' 이미지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대중으로부터 내팽개쳐진 그녀는 피겨 스케이팅을 그만두게 되면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게 된 것 같다. 1994년 동계 올림픽에서 8위를 하고도 기뻐하는 자신보다 은메달을 따고도 시상대 위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여준 낸시 캐리건을 보면서 그녀는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제3자가 평가하는 것이 아닌 지극히 상대적이고 자신만이 평가할 수 있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토냐는 연맹에서 영구 제명되면서 그 순간은 인생이 끝난 줄 알았겠지만 깨달음을 바탕으로 악착같이 지금까지 인생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There's no such thing as truth. It's bullshit. Everyone has their own truth, and life just does whatever the fuck it wants."

서론에서 언급했다시피, <아이, 토냐>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토냐 하딩의 시점을 중심으로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그녀를 동정심으로 변호하지 않고 그녀가 결코 은반 위의 악녀가 아님을 호소하지 않으며 객관적인 태도를 최대한 지키려고 하지만, 토냐 하딩이 이 영화의 중심인 이상 일부 장면에서는 영화가 지키려고 했던 객관성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낸시 캐리건 폭행 사건' 이후 진행된 그녀와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와 증언을 재현함으로써 "진실 따위는 어디에도 없어. 다 개소리야"라는 그녀의 말을 가정 하에 그녀의 삶을 평가하려 달려들지 않고 바라본다. 우리는 그녀가 '낸시 캐리건 폭행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지 아니면 방관자였을 뿐이었는지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사건의 진실은 오로지 그녀만 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쉽게 그녀를 동정하지 못하면서도 '악녀'라고 손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 라보나와 달리 자식에게 좋은 엄마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