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에 담긴 따뜻한 온도를 인생의 참맛을 헤아려보다: <밥정>

2020. 2. 20. 09:43짧게라도 남기고 싶은 영화

고하늘(서현진): 점심은 먹었니? 저녁은? 아직 안 먹었지?

- tvN 드라마 '블랙독' 9회 중에서 -

올해 2월 초에 종영한 tvN 드라마 '블랙독' 9회 마지막 장면에서 '고하늘(서현진)'은 생업 때문에 바쁜 엄마가 결국 대학입시설명회에 오지 않아 슬픔에 잠긴 제자 '진유라(이은샘)'를 위로하러 달려간다. '고하늘'은 학교 정문 근처에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진유라' 옆에 함께 앉아 위와 같은 말을 건넨다. 문자 그대로 본다면 밥을 먹었냐는 말은 정말 단순하다. 그러나 극 중에서 이 말 한마디는 어쩌면 긴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히기 힘든 응어리를 의외로 빨리 풀어놓는다. 즉, 밥은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것이지만, 돌이켜 보면 배고픔을 달래는 그 이상의 힘 혹은 따뜻함을 지니고 있다. 

박혜령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밥정> (2018)은 이런 정을 확장하여 인생의 참맛을 보여준다. <밥정>은 "음식은 사람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요리사이자 자연요리연구가인 임지호 셰프의 철학과 삶을 논한다. 무엇보다 임지호 셰프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의 여정에서 만나 특별한 인연을 맺은 김순규 할머니와의 10년이라는 세월 속 밥정(情)을 그려냄으로써 세상에 필요한 생(生)의 온도를 전한다.

"자연에서 나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다"

임지호 셰프는 잔디와 잡초뿐만 아니라 이끼, 나뭇가지 등 자연을 재료 삼아 요리를 만드는 셰프로 유명하다. 그런 그에게 친어머니와 양어머니에 대한 아픈 사연이 있으며 본인의 사연을 간직한 채 그는 여행을 떠나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정성이 담긴 요리를 대접한다. 그에게 걸음걸음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는 만나는 모든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그리움을 요리라는 행위로 달래고 상대방에게도 잊지 못할 정(情)의 선물을 안긴다.

지리산에서 만난 김순규 할머니와의 인연을 10년간 이어가지만, 임지호 셰프는 끝내 생애 어머니와의 세 번째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텅 빈 집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던 셰프는 며칠 동안 지리산 근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슬픔을 치유할 방법을 고민했고, 세 어머니를 위한 마지막 밥상을 차리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셰프는 어머니를 위한 밥상을 차리지 않는다면 어머니를 떠나보낼 수 없을뿐더러 영원히 화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심한 임지호 셰프는 마당 청소를 하고, 재료를 채취 및 손질하고 요리하며 세 명의 어머니를 위한 의식을 시작한다. 자기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그리고 마음을 나눠주신 어머니들을 위해 임지호 셰프는 3일 동안 108접시를 요리했으며 김순규 할머니의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제사를 모신다. 이 자리를 빌려 또 다른 인연을 맺은 임지호 셰프의 모습과 표정은 스크린을 관통해 따뜻한 정을 피우며, 이렇게 세상살이에 지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는 피로해소제다 된다.

가슴속에 묻어왔던
그리움 한 자락
평생의 길이 된 그 이름
기다림과 
그리움의 이름 어머니

수많은 길 위에서 만났고 
수많은 사람에게서 만났고
매일매일 밥상에서 만났습니다

때로는 어머니가 되고
때로는 손님이 돼서
나를 끌어안고 나를 맞이해서
흘린 눈물들이 꽃이 되었습니다

이제 보니
서럽게 걸어왔던 그 길에
언제나 함께했던 어머니의 손길이
때로는 등불이 되고
평온한 집이 돼서 나를 보듬고 계셨습니다
그 이름이 어머니였습니다. 

- 시 <어머니> (임지호 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