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생에 다가온 의미 있는 포옹 <오 루시!>

2019. 9. 17. 09:00주목할 만한 시선

제70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공식 초청을 받았고, 제32회 선댄스영화제에서 NHK상을 받은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의 <오 루시!>는 이번 달 초에 막을 내린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다. 사실, 이 영화는 2014년 제67회 칸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은 동명의 제목을 가진 단편을 장편으로 이야기를 발전시킨 작품이다. 주인공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는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고 삐뚤게 살아가는 중년 여성 캐릭터다. '세츠코'라는 캐릭터는 일본에서 '어라포(around forty)', 즉 중년 여성층을 중심으로 엄청난 공감을 일으키고 있지만, 과거의 행적과 엇나간 관계 때문에 세상을 비뚤게 바라보는 요즘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현대인을 연상시키므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리고 중년 여성층에 국한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그녀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카 때문에 우연히 방문한 영어학원에서 '루시'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녀가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서툴고, 어설프고, 충동적인 표현방법 때문에 당혹스러움을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로소 그녀에게 다가온 의미 있는 포옹 덕분에 관객들도 따뜻함이 감도는 조그마한 희망을 마음에 품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담배 연기가 자욱하던 세츠코의 삶, 예측 불가능해진 삶이 되다

출근길에 오르는 직장인 무리 속에서 세츠코는 무기력하게 전철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회사에 도착한 후 기운 없이 담배를 피우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세츠코는 끊임없이 기침을 하는데, 이는 단순히 흡연으로 인한 게 아니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몸 밖으로 표출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카 미카(쿠츠나 시오리)가 세츠코에게 갑자기 연락을 했고, 그 전화를 계기로 기계적으로 반복되던 세츠코의 삶이 그녀에게 나름 긍정적인 방향으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조카의 황당한 부탁으로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그녀는 영어강사 존(조쉬 하트넷)을 만난다. 그가 자신을 '루시'라는 영어 이름으로 불러주자, 그녀는 더 이상 무미건조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느낀다. 근데, 존이 갑자기 자신의 조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상심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든 사랑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로 일어서서 미국으로 떠난다. 이와 같은 그녀의 예측불허의 행동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지만, 오프닝에서 비쳤던 그녀의 모습을 염두에 둔다면 오랫동안 아물지 않았던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기대를 안고 떠난 미국행, 그러나 또 다른 내상을 입은 세츠코

언니 아야코(미나미 카호)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세츠코는 빨리 딸 미카를 만나고 싶어 초조해하는 언니와 달리 존을 만나 자신의 짝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있다. 존이 일본에서의 모습과 달리 처량하게 자신을 맞이해줬지만, 그래도 그를 만나 행복한 세츠코는 이번에는 본인이 먼저 다가가 존을 포옹해준다. 존과 헤어진 미카가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동하는데, 깊어진 밤 그녀는 존과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낸다. 존의 팔뚝에 있는 '愛'라는 문신을 본 세츠코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똑같은 문자를 자신의 팔뚝에 문신을 새긴다. 예상과 달리, 세츠코의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놀란 존은 그녀의 사랑 고백을 거절한다.

다음날, 언니가 존과 함께 미카를 찾아 나선 사이, 길거를 혼자 배회하던 세츠코는 미카를 우연히 만난다. 타국에서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두 사람은 근처 해변가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존 이야기가 나오면서 질투심이 은연중 발동한 미카가 세츠코를 약간 얕잡아 보듯이 말한다. 자극받은 세츠코는 자신처럼 존의 '愛' 문신을 한 미카에게 자신의 문신을 보여주면서 결국 미카도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뉘앙스로 말하자, 결국 두 사람은 갑자기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한다. 자신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미카는 해변가로 투신하면서 세츠코의 모험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 때문에 언니와 조카가 충격에 빠져 자신을 외면하고, 게다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주던 존마저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세츠코는 씁쓸하게 일본으로 외로이 돌아온다. 

다시 내상을 입은 세츠코에게 다가온 진정한 포옹

휴가를 마친 세츠코는 회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동안 동료와 어울리지 못할뿐더러 조직 분위기를 해쳤던 세츠코는 상사의 의중을 파악하고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자발적으로 사직한다. 가족, 짝사랑, 그리고 회사로부터 외면을 받은 세츠코는 다시 한번 엄청난 내상을 입는다. 맨 정신으로 깨어있기 힘든 그녀는 수면제 약을 과다 복용하는데, 영어학원에서 알게 된 타케시(야쿠소 코지)가 때마침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그의 도움 덕분에 위기상황을 넘긴 세츠코는 외로움과 설움이 폭발하면서 존에게 그랬듯이 타케시에게도 느닷없이 달려든다. 그런데, 타케시는 세츠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스러울 만 하지만, 침착하게 그녀를 다독여준다. 그가 침착하게 그녀를 다독여준 이유는 아들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의식을 항상 갖고 있었고, 그런 죄의식이 상처 입은 세츠코에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도록 작용했기 때문이다. 타케시는 자신을 배웅하러 따라나선 세츠코와 헤어지기 전에 포옹을 한다. 하지만, 이번 포옹은 존이 그녀에게 해줬던 포옹과 차원이 다르다. 존의 포옹은 그저 43년 만에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면, 타케시의 포옹에는 따뜻한 기운과 진정성이 담겨있을뿐더러, 서툴게 자기감정을 표현하던 그녀가 앞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느냐는 작은 희망을 가져다준다. 

<오 루시!>의 엔딩은 해피 엔딩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서 말한 이전 포옹과 다른 타케시와 세츠코의 포옹의 의미가 피부에 와 닿는다면, 이 영화가 사랑을 찾아 떠난 모험담보다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악녀>나 <오션스8>처럼 여성 캐릭터가 극의 중심인 영화가 체감상 증가하고 있지만, 항상 아쉬운 점이 캐릭터가 현실적이지 않다 보니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다소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츠코라는 인물은 스크린에서 만나기 드문 현실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나 자신을 인물에 대입시켜 공감함으로써 용기와 희망을 얻어간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