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理性)이라는 장막 그리고 삶, <칠드런 액트>

2019. 7. 23. 00:48주목할 만한 시선

<어톤먼트> (2006)와 <체실 비치에서> (2018)에 이어 영국 출신 작가 이언 매큐언의 동명 원작 소설이 다시 한번 영화화되었다. 리처드 이어 감독의 영화 <칠드런 액트> (2018)는 소설에서 느껴지는 이언 매큐언의 날카로운 시선을 영화로 최대한 온전하게 이동시킨 작품이다. 영화 <칠드런 액트>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사물시(Dinggedicht) '표범(Der Panther)'의 일부를 빌려 살펴볼 수 있다. 시 '표범'의 마지막 연은 표범의 눈이 장막에 의해 가려져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볼 수 없게 되어 결국 수동적인 혹은 마비된 존재가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생명체를 이루는 구성 요소가 무언가에 의해 가려지거나 통제를 받게 되면, 그 생명체는 결국 존재론적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Nur manchmal schiebt der Vorhang der Pupille
sich lautlos auf -. Dann geht ein Bild hinein,
geht durch der Glieder angespannte Stille -
und hört im Herzen auf zu sein. 

가끔씩 눈동자의 장막이 소리 없이 
걷히면 형상 하나 그리로 들어가,
사지의 긴장된 고요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가서는 존재하기를 그친다.

- Rainer Maria Rilke(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Der Panther(표범)' 중에서

항상 본인이 맡은 업무에 열정적으로 매진할뿐더러 언행에 신중한 완벽주의 런던가정법원 판사 '피오나(엠마 톰슨)'는 이와 비슷한 존재론적 위기를 겪게 되는 두 가지 사건을 만난다. 하나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받은 남편 '잭(스탠리 투치)'의 고백, 또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백혈병 치료를 거부한 소년 '애덤(핀 화이트헤드)'의 생사가 달린 재판을 맡게 된 일이다. 법정 대리인 및 증인의 출석만으로 판결 내리는 게 무리하고 판단한 그녀는 소년의 진심을 알기 위해 병원을 직접 방문한다.

두 개의 사건은 관객들에게 '피오나'라는 인물이 오랜 기간 이성의 지나친 작용으로 인해 감성에 족쇄가 채워진 존재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즉, 릴케의 시 '표범'에서 눈과 장막은 이 영화에서 각각 '피오나'의 감성과 이성으로 변용되었다. 첫 번째 사건을 접하기 전까지 그녀는 개인적인 삶을 공적인 삶의 방식처럼 살아왔으므로 남편의 고백을 듣자마자 엄청난 심적 균열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사건의 여파로 당연히 법과 판례에 근거한 정당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그녀는 소년이 있는 병원을 직접 방문하겠다는 결정을 느닷없이 내린다. 이는 그녀가 존재론적 위기를 경험하는 동시에 당연하게 여기던 법이나 이성적인 사고가 어긋남으로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스스로 마련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사건의 경우 판결 이후 벌어지는 상황이 '피오나'를 심리적으로 뒤흔든다. '피오나'와의 만남 이후 그녀의 지적인 면모에 매료된 '애덤'은 그녀를 몰래 뒤쫓을 정도로 심각한 집착을 보인다. 그녀는 1989년에 제정된 아동법에 의거하여 아동의 복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소년을 위한 판결을 내렸을 뿐인데 소년이 자신에게 매달리자 처음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재능이 많은 전도유망한 소년이기에 올바른 길로 지도하고자 그녀는 최대한 거리를 두며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병이 재발했지만 치료를 강경히 거부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정형화된 논리와 가치관으로만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또한, 삶은 이성적인 판단으로 가꿀 수 없는, 즉 그 이상의 책임감을 요구할 정도로 대단히 무겁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된다.

소년의 충격적인 모습을 확인한 후 집에서 남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피오나'의 모습과 하얀 눈이 뒤덮인 어딘가를 남편과 함께 거니는 엔딩 시퀀스는 갑자기 들이닥친 두 개의 사건으로 존재론적 위기를 경험한 그녀가 드디어 감성을 가렸던 이성이라는 장막을 완전히 걷어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모습은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루는 존재로 회복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