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주는 동정으로 남지 않기 위한 영화 <가버나움>

2019. 8. 27. 17:00주목할 만한 시선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나딘 라바키 감독의 <가버나움> (2018)의 연기자는 모두 전문 연기자가 아닌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환경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다. <가버나움>을 관람하면서 떠올리게 되는 영화는 네오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인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 (1948)이다. 왜냐하면 <가버나움>과 <자전거 도둑> 모두 가정법적인 시공간의 성격을 지닌 매체에 알맞은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 대신 현실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비전문 연기자를 캐스팅함으로써 익숙한, 그리고 어쩌면 왜곡된 이미지에 가려진 현실의 이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버나움>과 <자전거 도둑>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가 모호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두 작품은 결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자전거 도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울해진 당시 이탈리아의 현실과 안타까운 실업자의 현실을 미세하게 접근하는 반면, <가버나움>은 다큐멘터리와 일반 드라마 영화의 성격이 혼재되었음에도 레바논 사태와 그런 상황에 놓은 빈곤한 사람의 삶을 약간 인위적이라고 여길 수 있는 시각적 이미지를 여러 플래시백 장면을 거쳐 표현한다. 그래서 <가버나움>은 언론을 통해 전달된 이미지 뒤에 가려진 이면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슬픔과 비극적인 현실을 쉽게 스크린으로 옮겼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더 나아가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흘리는 눈물에 당연히 진정성이 담겨 있겠지만, 어쩌면 이 눈물 역시 이창동 감독의 <밀양> (2007)에서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김종찬’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준 공감이 아닌 사회화를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적인 수직적인 동정일 수도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버나움>은 언급된 지적과 비판을 극복하고 영화의 힘을 믿는 진심에 시작해 동정이 아닌 공감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작품이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영화가 실제 상황을 이상적으로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최소한 이 상황 테두리 밖에 있는 대중들이 상황 안으로 눈길을 돌려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그렇다면 이 확신에서 출발해 어떻게 동정이 아닌 공감으로 향하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분명 <가버나움>은 빈곤과 허덕이는 이들의 의식주 문제를, 생계를 위해 매매혼되는 어린아이들의 현실, 상대적으로 그나마 나은 지위를 이용해 난민을 갖고 장난치는 일부 사람의 모습 등만을 열거하는 일차원적인 접근법을 보여주고 있기에 공감으로 전진하는 과정을 찾아내기 힘든 영화다. 게다가, ‘자인(자인 알 라피아)’의 웃는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해 간직하는 엔딩 장면 또한 이 영화가 주장하고자 하는 공감과 거리가 멀다. 

<가버나움>은 상처를 남기는 수직적인 동정을 반박하려는 목적으로 ‘종교’를 끌고 온다. 불법 체류로 수감된 이들을 위해 종교인들이 방문해 종교적인 구원과 믿음으로 이들의 상황을 동정하거나 ‘자인’의 엄마는 딸 ‘사하르(하이타 아이잠)’가 죽은 상황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종교적인 해석에 의존한다. 이를 종교적인 희망과 동정의 허(虚)를 시각화한 장면과 언어적인 방식으로 반박한다. 우선, 영화는 중간중간 하이 앵글 숏(high angle shot) 혹은 버즈 아이 뷰 숏(bird’s eye view shot)을 활용하는데 어둠 속 전선에 걸쳐 있는 듯한 십자가를 연상하게 하는 그림자를 하이 앵글로 보여준 장면이 있다. 이는 어떤 빛도 일절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영화의 기저에는 종교적인 희망을 믿지 않는 시선이 깔려있음을 함의한다. 

그리고서 언어적인 방식으로 이와 같은 시선을 형상화하는데, 자인과 엄마의 면회 장면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자인은 신은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돌려준다는 엄마의 말에 엄마는 감정이 없고 모든 말이 칼처럼 심장을 찌른다고 눈물이 맺혔지만, 건조하게 말하며 교도소에 수감된 자신의 상황을 동정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다음, 재판장에서 내뱉은 자인의 부모의 호소는 동정을 차단하는 작업과 공감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마지막 관문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자인의 부모가 재판장에서 보이는 호소는 자기의 죄를 면피하기 위한 목적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이 호소는 사회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지적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뿐더러, 동정 이전 현재 사회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무엇인지 고찰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공감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마지막 관문은 재판장에서 자인이 던진 마지막 질문이다. ‘자인’은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도 못했지만, 갑자기 사라진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의 아들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를 혼자 보살피다가 결국 시장 아저씨에게 넘기면서 발동되는 죄의식으로 인해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이 눈물을 통해 책임감의 무게를 어린 나이에 깨달은 자인은 판사에게 태어나면 자신처럼 될 엄마 배 안에 있는 아기를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며,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답이 없는 질문이다. 다만, 이 질문 후 형성된 숙연하고 무거운 공기가 앞으로도 유지되고 잊히지 않는다면 서서히 수평적인 공감을 향해 걸음을 옮길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근데, 이와 동시에 자인의 질문과 질문이 만들어낸 분위기가 재판 기록문이 법정 기록 보관소에 저장되는 일에 그친다면 수직적인 동정은 하지 않았지만, 수평적인 공감을 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