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이미지와 생략된 물음표, <해피엔드>

2019. 8. 26. 17:00주목할 만한 시선

미카엘 하네케 감독과 관련된 키워드는 '리얼리스트'와 '폭력'이다. 두 키워드는 연결되어 있지만, 단순히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현대 사회에서 드러나는 폭력성과 선정적인 사건을 영화에 포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명백한 오산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폭력을 당한 적이 없지만, 초기작에 해당하는 <히든> (2005)에 드러나는 알제리 전쟁에 관한 유럽인의 부채의식처럼 폭력이 자기 일이 아니어도 과연 이를 묵과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이러한 고민은 그가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와 거리를 어떻게 할지를 고뇌로 이어진다. 이처럼 폭력을 비윤리적으로 소비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관객들에게 각 작품이 다루는 소재 혹은 주제의식이 본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주는 동시에 계속 고민하는 태도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를 고려한다면, 비록 <해피엔드> (2017)는 너무 많은 인물이 등장해 메시지의 응집력이 약했지만, 결국 전작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신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페이스북 메신저, 스냅챗, 유튜브 스트리밍 등을 장면 일부로서 활용한다는 점에서 누군가는 <해피엔드>가 그의 도전적인 작품이자 필모그래피에서 전환점이 될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 현대인들의 삶이 스마트 폰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그저 영화적 도구 중 하나로 사용했을 뿐, 스마트 폰을 매개로 현대사회에서 목격할 수 있는 소통 및 관계의 붕괴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더 나아가, 감독이 '해피엔드'라는 제목에 온점을 붙이지 않은 이유가 스마트 폰으로 쉽고 빠르게 답을 찾으려는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붕괴 이미지의 연속

<해피엔드>는 '에브(팡틴 아흐뒤엥)'가 우울증에 걸린 엄마의 모습과 엄마의 우울증 치료제를 먹은 햄스터의 반응을 스냅챗으로 생중계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오프닝은 가정에서 고립된 아이들이 이 상황을 대처하지 못했을 경우 어떤 미래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는 <하얀 리본> (2009)을 떠오르게 하면서도, 시작부터 감독 본인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려는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에브'처럼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지, 그리고 불안한 심리로 인해 드러내는 폭력성을 과연 우리가 쉽게 비난할 수 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그다음에 나오는 붕괴 이미지는 로랑 가의 공장 건설 현장에서 발생한 붕괴사고를 담아낸 CCTV 화면이다. 이 이미지는 만약 소통이 무너지고 누군가 소외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면 사회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음을 예견한다. 그 뒤에 나오는 세 번째 붕괴 이미지는 앞서 보여준 공사 현장의 붕괴 사고 소식을 전달하는 TV 뉴스 화면이다. 세 번째 이미지는 타인의 고통을 무심히 전달하는 전자매체와 이를 그냥 지나치는 현대인을 고발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세 개의 붕괴 이미지를 종합적으로 미루어 볼 때,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성의 접촉 및 소통 회복을 향한 염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르주아 가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의 붕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붕괴 사고 이후 로랑 집안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에브가 칼레에 있는 로랑 집안의 부르주아 저택에 들어오게 되면서 시작한다. 저택에는 총 3세대가 같이 살고 있는데, 1세대는 '조지(장 루이 트린티냥)', 2세대는 '앤(이자벨 위페르)'과 '토마스(마티유 카소비츠)', 3세대는 앤의 아들 '피에르(프란츠 로고스키)', 토마스의 딸 에브와 갓난아이 '폴'이다. 3세대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듯해 보이지만,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조금이라도 평화가 위협받을까 봐 불안 속에 살아간다. '앤'은 가족에게 다정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녀는 권력과 경영 세습을 유지하는 데에만 걱정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가족 식사 장면에서 보이는 걱정은 애정을 빙자한 무관심일 뿐이다. '토마스'는 권위 있는 의사로 인정받지만, 페이스북 메신저 채팅창을 통해 그는 가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데 바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고를 당한 노동자들과 난민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권위와 인맥을 이용해 이를 뒷수습하고 은폐하는데 정신없을 뿐이다.

이에 대해 '조지'는 비록 본인이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잠깐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직접 이뤄낸 성공과 가족이 무너지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으려고 노력한다. 3세대인 '피에르'는 허울뿐인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애정을 받기는커녕 자율성을 박탈당한 채 경영 세습의 도구로 전락하고, 결국 점차 이성을 잃은 듯한 돌발적 행동을 보이며 소외된다. '에브'는 새로운 가정에 정착하고 싶지만, 다시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심지어 나중에는 사랑받는 것을 포기한다. 특히, 아빠가 두 번째 아내 '아나이스(로라 베린덴)'를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직감한 '에브'는 자살 시도를 하는데, 본인이 목숨을 끊으려고 한 이유를 전혀 깨닫지 못한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에브'는 더는 누군가에게 이해받으려는 시도조차 포기해버린다. 

물음표가 생략된 영화 제목

영화의 엔딩은 행복한 결말과 거리가 대단히 멀다. 하지만, 영화 제목에는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가 생략되어 있다. 즉,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명백하지 않은 제목을 빌려 결론을 절대로 낼 생각이 없는 본인의 확고한 의지를 드러낸다. 극 중에서 인물들은 의사소통할 때 대체로 서로의 시선을 피하거나, 자기 이야기만 전달하거나, 혹은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면하지 않고 스마트 폰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서재에서 일어나는 할아버지와 '에브'의 대화 장면은 일련의 희망으로 다가온다.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내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속내를 털어놓고,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에브'는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에브'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자신의 속내를 할아버지한테 내비친다. 물론, 할아버지가 자살을 위해 '에브'를 이용했지만, 감독은 인생에서 대척점에 놓인 두 사람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던 인간성의 접촉과 소통의 회복을 위한 길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과 같은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할아버지의 자살 시도를 촬영하는 에브처럼 타인의 죽음과 고통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 괴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