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추가 시간을 죽였네" <콜드 워>

2019. 8. 27. 10:00주목할 만한 시선

제8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다> (2013)로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감독은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콜드 워> (2018)로 돌아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콜드 워>는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극심해져 도래한 냉전 시대를,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괴된 폴란드를 배경으로 삼는다.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감독은 차갑고 메마른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명암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흑백 촬영을 택했지만, 4:3 화면비와 함께 전반적인 프레임을 구성하며 이데올로기가 개인에게 미치는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을 미학적으로 그려낸다.

폴란드 민속음악에 관심이 많은 '빅토르 바르스키(토마즈 코트)'는 민속음악단 '마주르카(Mazurek)'를 이끄는 음악가다. 그의 음악단에 재능 있는 '줄라 리호(요안나 쿨릭)'가 찾아온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1949년 두 사람은 사회적 위치 및 과거와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음악을 매개로 이어진다. 그러나 1952년 두 사람은 음악 때문에 동베를린에서 헤어진다. 물론 엄연히 따지면 공산주의 정권의 간섭에 둘러싸인 음악적인 환경 때문이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연출한 <레토> (2018)를 잠깐 소환해 이야기하자면 당시 소련 록 밴드는 정권이 원하는 사회적 역할만을 한다는 전제하에 활동할 수 있었다. 즉, 공산 정권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음악을 포함한 예술 분야를 선전 수단으로 삼았다.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지만 <콜드 워>에서 '마주르카' 민속음악단 역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지도자를 칭송하고 순수 슬라브주의를 주창하는 음악에 회의감을 느꼈을뿐더러 공산주의 국가 간의 결속력이 점점 강화되면서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을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빅토르'는 1952년 동베를린 공연을 마친 후 '줄라'와 함께 파리로 망명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망명 후 불투명해질 수 있는 삶이 두려운 '줄라'는 '빅토르'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으며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만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재회와 헤어짐을 수차례 반복한다. 

시대적, 정치적 한계가 명확해질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완성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상황 속 감정 변화를 음악과 카메라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감정이 안정적일 때는 관현악의 선율과 전통적인 선율이 흐르지만, 감정이 불안정해질 때는 재즈를 포함한 현대적인 음악이 두 사람의 심리를 대변한다. 카메라 촬영의 경우 두 사람의 사랑이 이데올로기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졌을 때 진행 방향과 상관없이 어루만져주듯이 천천히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이와 더불어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수평 트래킹 숏으로 보여준다. 이와 반대로 두 사람의 사랑이 불안정의 상태에 빠지면 카메라는 상대적으로 많은 흔들림을 주며 둘의 감정과 일체화된다. 특히, 1957년 파리에서 재회했을 당시 장면이 인상 깊다. 두 사람이 섹스하면서 시선을 교환할 때 잠깐 사운드를 소거하고 카메라는 두 사람의 얼굴을 온전히 담아내며 장면을 밀도 있게 구성한다. 

'빅토르'와 '줄라'는 떨어져 있는 동안 각자 다른 사람과 연인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빅토르'는 '줄라'가 자신에게 유일한 여자임을, '줄라'는 '빅토르'가 자신에게 유일한 남자임을 알아차린다. 근데,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한 채 1959년을 맞이하게 된다. '빅토르'는 '줄라'를 위해 전부를 포기하고, '줄라'는 '빅토르'를 위해 희생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모든 한계에서 초탈하기 위해 처음 만난 곳으로 떠난다.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두 사람의 사랑이 모든 장애물로부터 해방된다. 그런데 이 사랑이 깊은 여운을 자아낼 수 있던 이유는 폐허가 된 교회의 벽에 그려진 신의 두 눈의 관점에서 '빅토르'와 '줄라'가 사랑의 서약을 읊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에 영원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나자 뒤에 있던 수풀들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경치는 메마르고 차가운 땅에 핀 꼿에 축복을 내려주는 인상을 남긴다.  

만약 <콜드 워>가 뜨겁고 강렬한 러브스토리인 이유를 말하라고 한다면,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장애물을 이겨낸 불가능한 사랑을 다뤘기 때문이 아니라 88분 동안 세월의 흔적과 두 사람의 감정을 세밀하고 진솔하게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줄라'가 부른 노래 '심장'의 가사 '시계추가 시간을 죽였네'처럼 시간에 상관없이 완성된 사랑을 <콜드 워>를 통해 감상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