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상함과 불쾌함 그 사이 어디쯤 <나와 봄날의 약속>

2019. 9. 18. 09:00어쩌다가 쓴 리뷰

"어차피 망할 거, 다 같이 잘 망하자! 아름답게~"

지구 종말 관련 영화를 떠올린다면 대개 SF와 스릴러 장르를 기반으로 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투모로우> (2004)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 (2006)을 언급할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중위의 여자> (2007)와 <장례식의 멤버> (2008)을 통해 남다른 스토리텔링을 보인 백승빈 감독의 지구 종말 관련 영화 <나와 봄날의 약속> (2017)은 전형성을 무시할 정도로 너무나 독특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 담긴 세계관은 다가오는 지구 종말로 인해 어차피 망할 거 다 같이 잘 망하자는 것이다. 즉, 모두가 각종 질병으로 가득하고, 시들고, 복잡한 사회와 작별하고 봄날과 같은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자는 염원이 담겨 있다. <나와 봄날의 약속>은 네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에피소드에서 백종빈 감독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이 영화만이 갖고 있는 괴상함은 힘을 잃기 시작하는 반면, 여성 인물을 다루는 감독의 태도에서 점점 불쾌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느껴지는 언짢음은 지우기 힘들 것이다.

방황, 전형성, 질병적인 무력감, 남성 중심성으로 찌든 사회

네 개의 에피소드는 지구 종말을 예상한 외계인들이 영화감독(강하늘), 여중생 한나(김소희), 대학교수 의무(김학선), 그리고 독박 육아에 지친 가정주부 수민(장영남)을 찾아가 벌이는 생애 마지막이 될 충격적인 생일파티라는 설정을 갖는다. 10년째 필모그래피를 쌓지 못하고 여전히 시나리오를 적고 있는 영화감독은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숲에 있다가 자신을 아는 영화 광팬 요구르트 판매원(이혜영)을 만난다. 그녀의 거래 제안으로 자신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가 들려주는 지구 종말 직전 사회는 파괴할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한나는 학교에서 질문보다 그저 사회가 정한 규범대로 행동하기를 바라고 강요받기를 몸소 경험하고, 대학교수 의무는 아름다운 미국의 낭만주의 시를 가르칠 뿐이지 현실은 질병적인 무력감에 굴복해 삶을 포기하듯이 살고 있고, 수민은 한때 여성 인권 운동을 주도했지만 현재는 독박 육아에 지쳐 동태눈을 하며 지친 마음을 몰래 피우는 담배로 달랜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네 외계인은 질병 같은 사회와 작별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한 선물을 주기 위해 갑자기 등장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팍한 옆집 아저씨(김성균)는 뜬금없이 한나를 데리고 목적은 있지만 방향 없는 드라이브를 떠난다. 그런 그가 한나에게 준 선물은 미스터리한 약물인데, 그 약물은 전형성과 규범에 굴복하지 않는 태도와 사고방식을 잃지 말라는 용기를 상징한다.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여대생(송예은)은 의무에게 내일 지구가 종말 하더라도 질병 같은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고백은 그동안 시들었던 꽃으로 가득했던 의무의 마음을 다시 꿈틀거리게 만들면서 포기하지 않는 삶의 의지를 선물한다. 대학 후배라고 소개하는 자유로운 영혼 미션(이주영)은 육아와 집안일에 지쳐 잊고 있었던 수민을 자극함으로써 잠자고 있던 주체성을 깨우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요구르트 아주머니는 영화감독이 이러한 이야기를 글이 아닌 직접 말로 정리하는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본인도 몰랐던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일깨우는 데 도움을 준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나와 봄날의 약속>의 여성 인물을 다루는 태도

이렇게 괴상하지만 독특한 설정으로 감독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던 메시지를 능숙히 전달하지만, 여성 인물을 다루는 그릇된 태도는 <나와 봄날의 약속>을 온전히 즐기는 것을 영화 스스로 방해한다. 예를 들어, 여중생 한나의 에피소드에서 아저씨는 좁은 차 안에서 한나의 가슴을 만지려는 시늉을 내는데, 겁에 질려 화들짝 놀란 한나의 모습을 보고 아저씨는 그저 장난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여중생과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 아저씨는 거친 언행을 보인다. 과연 이러한 극 중 아저씨의 태도가 웃음으로 무마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질병 같은 로맨스를 다루는 에피소드에서도 문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대생이 헤어지기 전 영화 <은교>처럼 교수에게 섹슈얼을 어필하고 교수는 그 여대생에게 저돌적으로 다가가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나누는데, 이 장면은 왜곡된 성의식을 적나라게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수민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백승빈 감독이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가부장제를 문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페미니즘을 오로지 급진적인 운동이라고 서술한다는 점에서 감독이 갖고 있는 페미니즘에 관한 편견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나와 봄날의 약속>은 관객들이 기대하던 독창성을 충분히 보여주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과 태도로 인해 처음에 띈 미소가 점차 사라지고 대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