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상실의 길에서 펼쳐지는 인간성의 여정 <몬태나>

2019. 9. 15. 10:00어쩌다가 쓴 리뷰

"The essential American soul is hard, isolate, stoic, and a killer. It has never yet melted." - D.H. Lawrence

영화 <몬태나>의 도입부는 영국의 소설가, 시인 겸 비평가였던 D.H. Lawrence의 문구를 인용한다. 이는 이 영화가 억세고, 고독하고, 초연하며 살의에 찼던 미국 영혼의 본질, 즉 미국인의 호전성을 고전적 영화 장르 중 하나인 웨스턴 무비를 빌려 다룰 거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몬태나>는 미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대자연 속 강렬함과 야만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아서 성찰하려고 했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2015)와 달리 미국의 역사를 있게 한 미국 영혼의 본질을 위해 미국 뉴멕시코 주에서 몬태나 주까지 1,000 마일이라는 가늠할 수 없지만 굉장히 길고 분명히 고된 여정의 길을 시종일관 느린 템포와 무거운 호흡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템포와 호흡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던 인물들이 죽음과 상실의 길을 동행하면서 나중에는 서로를 경계하지 않고 심지어 동료의 죽음을 같이 지켜봄으로써 일어나는 숭고미를 피부에 와 닿게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1,000 마일 여정의 출발점: 증오

전설적인 대위 조셉 J. 블로커(크리스찬 베일)은 전역 전 죽음을 앞둔 옐로우 호크 추장(웨스 스투디)과 그의 가족을 몬태나 주에 있는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호송하라는 마지막 임무를 받았다. 증오심에 사로 잡혀 있는 조셉 블로커는 자신의 동료들을 무참하게 죽인 옐로우 호크 추장과 그의 부족들 오로지 복수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지 않겠다고 거부 의사를 보였지만, 상사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는 우선 호위군을 꾸려 출발한다. 상사 앞에서 격식을 차리던 그는 상사가 보이지 않는 위치에 이르자 말에 내려 옐로우 호크 추장과 그의 가죽의 손을 쇠사슬로 묶으라고 사병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어차피 손이 묶인 채 1,000 마일의 여정을 출발한 옐로우 호크 추장과 그의 가족이지만, 그들의 손을 쇠사슬로 다시 묶는다는 것은 조셉 블로커의 분노를 상징하며, 특히 인디언을 향한 그의 증오심과 온갖 감정을 표출하는 장면을 소리를 소거한 채 눈빛과 표정만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그의 분노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헤아릴 수 있는 순간이다.

얼마 가지 않아 로잘리 퀘이드(로자먼드 파이크)라는 여인이 긴 여정에 동행하기 시작한다. 코만치 부족 중에서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가지 않은 래틀 스네이크 무리에 의해 남편, 두 딸과 아기를 잃은 그녀도 인디언을 경멸에 찬 눈길로 바라본다. 그래서, 조셉과 그의 부하들의 배려로 더 이상 황량한 들판에서 혼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그녀는 손이 쇠사슬로 묶인 옐로우 호크 추장과 그의 가족을 보자마자 그들이 자기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내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인디언 부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특히, 자기 가족을 몰살한 코만치 부족이 재등장하여 조셉의 무리를 위협하는 장면에서 코만치 부족 시체에 장전된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총을 쏘는 모습은 그녀의 극심한 분노를 대변한다. 물론, 인디언들도 미국인을 향한 증오감에 사로 잡혀 있다. 왜냐하면, 미국 개척자들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주인 행세를 하면서 총으로 위협하고, 자신들을 고향으로부터 내쫓고, 야만인 취급을 하면서 자신들의 삶과 전통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가 일생일대의 적임에도 증오를 품고 길을 떠난다. 

1,000 마일 여정의 중간 어느 지점: 증오 관계에서 신뢰 관계로서의 변화

옐로우 호크 추장이 조셉에게 로잘리 일가를 급습한 코만치 부족이 곧 자신들을 기습 공격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음에도, 조셉은 추장을 전혀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예언을 무시한다. 하지만, 추장의 예언대로 자신들을 향해 기습 공격을 하고, 방어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아끼는 사병이 죽자 조셉은 절망감에 휩싸이지만 옐로우 호크 추장과 그의 아들 블랙 호크(아담 비치)가 쇠사슬로 손이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만치 부족에 함께 대항해 싸움으로써 위기 상황을 넘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증오심으로만 가득했던 과거가 서서히 서로를 신뢰하는 현재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과거에는 로잘리의 가족을 묻을 때 군인만 그녀와 함께 묻는 걸 돕고 인디언들은 감시당한 채 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반면, 코만치 부족의 기습 공격 이후 이들은 예전과 달리 하나의 공동체로서 마음을 공유한다. 조셉은 쇠사슬을 풀어주고, 블랙 호크는 가족을 대표해서 로잘리를 위로하는 동시에 그녀의 죽은 가족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자신들이 직접 짠 옷감을 선물하고, 서서히 마음이 풀린 그녀는 아픈 추장을 간호한다. 삶보다 죽음이 더 일상적인 여정의 길 위에서 그들은 서서히 경계심을 풀고 깊은 신뢰관계를 형성한다. 옐로우 호크 추장이 로잘리에게 건넨 자신의 영혼은 그녀 안에 있고, 그녀의 영혼은 자신 안에 있다는 말은 긴 여정의 중간 어느 지점에 이르자 더 이상 서로를 적대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적대심에 사로잡힌 과거와 마주하는 상황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1,000 마일 여정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출발점: 용서와 이해

온갖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간 끝에 조셉 대위는 몬태나 주에 위치한 옐로우 호크 추장과 그의 가족의 고향 '곰의 계곡' 근처에 도착한다. 옐로우 호크 추장은 죽기 직전 조셉과 대화를 나눈다. 둘은 죽음과 상실의 길을 같이 걸으며 신뢰감을 형성했지만, 여전히 서로의 동료를 무참히 죽인 것에 대한 분노를 잊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죽음은 인간이 맞이해야 하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삶의 사건 중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를 용서하고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곰의 계곡에 도착한 조셉 대위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추장의 가족을 도와 옐로우 호크의 장례를 함께 치른다. 인간이 죽은 자를 땅에 묻을 때 인디언들이 곁을 지키거나 함께 손에 흙을 묻히면서 도왔다면, 인디언 부족이 죽은 자를 하늘 가까이 올림으로써 장례 의식을 치를 때 조셉과 나머지 사람들은 묵묵히 돌을 쌓고 나무 기둥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탠다. 호전성에 의해 잊힌 인간의 숭고미를 여정의 끝에서 엿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1,000 마일의 여정의 끝은 순탄하지 못한다. 조셉 대위가 옐로우 호크 추장과 그의 가족을 곰의 계곡에 안전하게 호송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이 적힌 문서를 지니고 있음에도, 백인 무리들이 등장해 곰의 계곡은 현재 자기 땅이며 인디언은 야만인이기 때문에 꼴 보기 싫으니 당장 이 땅을 떠나라고 협박을 하며 조셉이 갖고 있는 문서마저도 무시해버린다. 이 상황에 분개한 조셉은 물러서지 않고 총구를 백인 무리들에게 겨누고, 로잘리도 동참한다. 이렇게, 피의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결국 조셉, 로잘리, 그리고 블랙 호크의 아들만 살아남는다.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고 무사히 떠날 수 있는 상황을 맞이했지만, 또 다른 피의 전쟁 때문에 조셉과 로잘리는 죽음을 목격한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와 달리 죽음에 초연해져 있으며 말없이 잠잠한 태도로 고독을 집어삼킨다. 

긴 여정을 끝으로 조셉 대위는 로잘리와 블랙 호크의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눈다. 로잘리의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는 조셉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을 대변하지만, 조셉 대위는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아이에게 자신이 읽던 책을 선물을 주며 안녕을 기원하며 각자의 길을 떠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순간 내적 고민을 하던 조셉은 로잘리와 아이가 승차한 기차를 뒤에서 지켜보다가 마지막 칸에 오르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이들이 새로운 삶을 함께 할 것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우리가 적대시해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게 만든다. 혹은 명확한 선악 구분 없는 영화 <몬태나>를 통해 엔딩에서 비로소 우리의 자기모순적인 태도를 발견하고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