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묶인 과거로부터 벗어나기까지 <아사코>

2019. 8. 30. 17:00주목할 만한 시선

제71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아사코 Ⅰ&Ⅱ> (2018)는 <해피 아워> (2015)를 연출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이다. 극 중 주인공 아사코(카라타 에리카)는 갑자기 떠난 첫사랑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를 잊지 못하고 살다가 오사카를 떠나 도쿄로 이사한다. 과거의 파편에 묶인 아사코는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몇 년이 흘렀음에도 달라진 게 없다. 다만, 굳이 달라진 게 있다고 한다면 그녀의 삶은 굉장히 무료해졌다는 점이다. 어느 날 그녀는 바쿠와 똑같은 외모를 가진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를 만난다. 바쿠와 닮아서 호감을 느끼지만, 바쿠와 닮아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료헤이는 그런 아사코가 이해가 안 되지만, 몇 번의 만남을 통해 그 역시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며 고백한다. 

두 사람은 키스를 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사코가 급작스레 료헤이와의 이별을 고한다. 그런데, 아사코의 친구 마야(야마시타 리오)의 첫 공연 날 지진이 일어난다. 갑자기 이별을 선언한 아사코를 만나기 위해 반차를 내고 공연을 보러 온 료헤이는 그냥 회사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정처 없이 길을 걷던 그의 앞에 갑자기 아사코가 등장한다. 재회한 두 사람은 포옹하는데, 영화는 이때부터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자면, 지진이 일어난 후 진행되는 시퀀스는 절대로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는 시퀀스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 및 국민은 엄청난 내적 혼란을 겪고 있다. 현재를 살고 있지만, 마음만큼은 과거에 묶여 있고, 또한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런 상황이 영화에서는 아사코라는 캐릭터에 반영된다. 바쿠는 아사코처럼 과거의 파편 조각에 묶여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아사코처럼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상황이 투영된 인물이다. 왜냐하면 바쿠는 주변 사람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구체적인 목표 없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사코는 현재 상황으로 인한 희망과 혼란스러움 속에서 본인이 바쿠를 원하는지 아니면 료헤이를 원하는지 헷갈린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게 해결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사코는 료헤이와 동거를 하고, 다시 한번 긴 시간이 흘러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료헤이를 원한다고 확신을 한다. 그러나, 자신을 떠난 바쿠가 다시 등장했을 때 아사코는 또 혼란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번에 그녀는 바쿠를 선택한다. 그리고 바쿠에게 본인이 료헤이와 함께 살면서 성장한 줄 알았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은 꿈이나 다름없었으며, 따라서 자신은 과거의 ‘나’와 달라지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아사코는 바쿠를 선택한 바로 다음 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료헤이라는 사실을 먼 길을 돌아온 끝에 깨닫는다. 사실 아사코의 이와 같은 감정과 선택의 번복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녀가 자신의 선택을 번복하게 된 이유가 의식과 무의식이 혼선을 빚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가 한 개인이 아닌 일본 사회를 대변하는 상징물로 생각한다면 조금이나마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사코는 파도를 보며, 불어난 강물을 보며 과거의 파편에서 벗어난다. 이제야 그녀는 성장한다. 아사코는 깊은 상처를 입은 료헤이가 자신을 앞으로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잘 알지만, 이제라도 바쿠라는 과거에 묶인 무의식에서 벗어나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새 출발을 하게 된다. 료헤이와 아사코가 새 출발을 하는 장면은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지만, 두 사람 친구의 출산 소식에서 유추할 수 있다. 새 생명의 소식은 곧 새 출발의 소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사코의 고백처럼 들리는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음악 역시 아사코의 성장을 암시한다. 아사코는 긴 시간이 흘러 비로소 사랑은 끊어지지 않지만 잡히지 않는 흐르는 강과 같으며, 형태가 정해지지 않아 손을 댈 때마다 쉽게 손길에서 벗어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성장하는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