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밀접한 운율 속에서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2019. 8. 31. 18:00주목할 만한 시선

"느리게 느리게 시간을 걷는다,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

<경주> (2013)와 <춘몽> (2016)을 거치면서 보다 더 확고히 운문처럼 운율적인 본인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한 장률 감독은 11번째 장편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로 돌아왔다. 소위 평단이나 관객이 ‘시적이다’라고 표현하는 영화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오로지 장률 감독의 영화만이 깊고 오래 지속 가능한 맛이 있는 운율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장률 감독은 어떤 이야기를 어떤 방법으로 관객에게 전달하기를 고민하기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심히 지나치거나 필요하지만, 너무 바쁜 나머지 느끼지 못한 삶의 리듬을 스크린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네아스트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영화 제목의 부제인 ‘거위를 노래하다’는 극 중 ‘윤영(박해일)’이 읊은 중국 고시 ‘영아(咏鵝)’의 뜻인 만큼, 제목을 통해 시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장률 감독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주된 장소는 전직 시인 ‘윤영’이 예전에 좋아했던 선배의 아내 ‘송현(문소리)’을 재회하는 ‘신촌’과 두 사람이 즉흥적으로 버스를 타고 내려가 특별한 목적이 없이 걷는 ‘군산’이다. 이야기 흐름으로는 원래 신촌에서 생기는 에피소드가 먼저 진행되어야 하지만, 장률 감독은 ‘윤영’이 신촌에서 자신이 원하던 남산 야경을 바라보는 장면을 기준으로 시간 순서를 재구성해 두 장소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전개한다. 그런데, ‘느리게 시간을 걷는다’라는 표현을 고려한다면, 군산의 시간이 신촌의 시간보다 더 이른 과거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윤영’이 ‘송현’과 함께 골목골목 걷는 군산은 일본식 주택과 단정한 마을에 의해 갇힌 일제강점기 시대의 시간이 여전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시간 흐름은 관념적인 시간이 아닌 경험되는 시간을 따르고 있다.  

시간 배치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한다면, 관객은 바로 이와 같은 시간 구성을 택한 이유가 궁금해질 것이다. 겉으로는 장률 감독이 시적인 리듬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런 것으로 보이지만, 아마도 관객에게 ‘윤영’처럼 느리게 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필요성을 들려주는 동시에 일상으로부터의 시간 및 공간적 분리를 일으키는, 즉 가정법적 시공간을 창출해내는 영화가 갖는 특징을 활용해 영화를 관람하면서 각자의 시간을 되돌아볼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많은 현대인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 경쟁 사회의 패러다임 속에 갇혀 소속 단체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나머지 자신의 정체성, 불확실함으로 가득 찬 감정,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본인의 모순적인 태도 등을 살피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지만, 오로지 수평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의 시선과 동행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관객은 장률 감독이 의도한 바와 같이 자신의 시간을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두 번째 궁금증을 해소한다면, 관객은 마지막 궁금증의 단계에 도착한다. 과연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현대인이 살피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불확실함으로 가득 찬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모순적인 태도가 무엇인지 말이다. 우선, 이 영화가 정의하는 정체성은 타인 및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자아다. 예를 들어, ‘윤영’이 갑자기 ‘약사(한예리)’에게 자신을 본 적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모습은 자신의 기억과 망상 사이에서 타인에 의해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모르는 불확실함을 해소하기 위한 욕구와 연관이 있다. 게다가 “윤동주가 연변 출신이잖아. 근데 그쪽에서 계속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송현’의 대사처럼, 윤동주 시인이 계속 연변에 살았더라면 공간과의 관계 때문에 그의 정체성은 ‘조선족’으로 정립되었을 것이다. 

불확실함으로 가득 찬 감정에 관한 질문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사실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지만, 이 감정이 단순히 호기심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와 관련이 있다. ‘윤영’은 좋아했던 선배의 아내 ‘송현’이 이혼해 다시 혼자가 된 사실이 기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의 마음이 자꾸 어긋나자 모호해진 자신의 감정에 답답함을 느낀다. 더 나아가, ‘윤영’이 자기도 모르게 일본 인형을 들고 다니는 ‘소녀(박소담)’이 계속 눈에 아른거리지만, 그런 이유를 정확히 모른 채 어느 날 소녀를 따라 움직이는 모습 역시 이 질문과 상관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모순적인 태도는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시선이 담긴 ‘경계인’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를 의미한다. 우선, 이전에 언급한 연변 출신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고 고향에서 생을 마감했다면 ‘조선족’이었을 거라는 ‘송현’의 대사에서 현대인의, 특히 한국인의 이중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처음에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연변 출신 가정부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다가 가정부가 본인이 좋아하는 윤동주 시인의 증조부의 사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윤영’의 태도 역시 현대인의 이중적인 태도를 상징한다. 

이처럼 세 단계에 걸친 굵직한 궁금증을 하나씩 해소함으로써 각자의 삶의 시간을 천천히 걸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는 장률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삶과 밀접한 운율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을 가장 신비롭게 다루는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