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스트로크에 밀도 있게 녹아든 감정 <보리 vs 매켄로>: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굴욕도 당신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2019. 9. 21. 10:00주목할 만한 시선

'테니스는 인생의 언어를 사용한다. 어드밴티지, 서비스, 폴트, 브레이크, 러브. 그래서 테니스 경기는 우리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42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된 <보리 vs 매켄로> (2017)는 테니스계 전설인 스웨덴 선수 비외른 보리와 미국 선수 존 매켄로의 이야기를 다루는 스포츠 실화 영화다. 이 영화는 테니스 역사에서 세계 최고의 명경기인 대회 5연패를 향해 질주 중인 세계 1위 보리와 그의 완벽한 도전자로 평가받는 매켄로의 1980년 윔블던 테니스 대회의 결승 경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엄청난 전율과  함께 박진감이 넘친다. 하지만, 라이벌 관계를 다루는 일반적인 스포츠 영화와 달리 야누스 메츠 감독은 두 선수가 치는 매 스트로크에 집중하면서 스트로크에 담긴 두 선수의 복잡한 감정과 사연을 침착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아마도 한국에서 2012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아르마딜로> (2010)를 연출한 그의 역량이 <보리 vs 매켄로>에서 힘을 발휘한 것 같아 보인다. 결국, <보리 vs 매켄로>는 테니스 자체에 목숨을 건 두 선수가 경기에서 보이는 서로의 모습을 일반 사람이 읽어낼 수 없는 부분까지 읽으며 존중을 표하는 모습을 선수들이 치열하게 싸우다가 몸이 으스러지든 길을 잃든 관심을 갖기 않고 오로지 승패에만 주목하는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영화라고 봐야 한다. 그랬기에, 두 선수가 코트 위에서 역사상 가장 멋진 경기를 펼친 어제의 경쟁자이자 최선의 적으로 기억된 사실에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부의 시선: 미스터 아이스 vs 코트의 악동

세상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보리(스베리르 구드나손)를 미스터 아이스로, 동물적인 감각의 플레이를 보이지만 거친 돌발행동을 보이는 매켄로(샤이아 라보프)를 코트의 악동이라고 부르면서 그 프레임에 갇혀 두 선수의 플레이를 평가한다. 보리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대회에서 세계 최초 최연소 윔블던 4연패를 달성했고 이제 5연패를 바라보게 되자 테니스 팬들은 그의 동선을 따라다니면서 심지어 훈련장까지 쫒아온다. 반면, 매켄로는 윔블던 대회를 앞두고 TV 토크쇼에 출연하지만 그에게는 보리와 달리 조롱의 시선이 꽂힌다. 근데, 외부의 시선으로 내린 판단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보리와 매켄로 둘 다 신경이 곤두서게 된다. 보리는 표정에서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환경이 사소하게 바뀌어도 바로 더욱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할 뿐만 아니라, 언론과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계속 받을수록 자기 내면과의 싸움에 깊숙이 빠지게 되면서 스스로 고립된다. 매켄로는 보리처럼 위대한 선수가 되어 그를 꺾고 윔블던에서 우승하고 싶은 열망이 강하지만, 대중에게 계속 노출될수록 본인은 그저 대회의 이슈메이커로 전락하는 느낌을 받아 더욱더 신경질을 부리며 경기 도중 관중과 설왕설래한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어제의 경쟁자이자 최선의 적

외부의 시선이 어떻든 두 사람은 서로의 경기를 TV 중계를 통해 지켜본다. 남들이 보기에 보리는 예상과 달리 약체와의 대결에서 고전하고 있지만 신기할 정도로 침착하고, 반면에 매켄로는 경기장 주변에서 들리는 비둘기 소리와 판정에 대한 항의 때문에 경기에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리는 매켄로의 감정의 이면을 꿰뚫고 있고, 매켄로도 마찬가지로 보리의 드러나지 않은 감정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보리의 현재 모습은 매켄로의 과거 모습과 비슷하고, 반대로 매켄로의 현재 모습은 보리의 과거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테니스 코트 위에서의 모습이 서로 뒤바뀐 이유는 둘 다 테니스 자체에 목숨을 걸 정도로 애착이 컸지만 꿈을 접지 않기 위함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보리와 매켄로는 각자에게 필요한 감정적 태도를 취했을 뿐이다. 그래서, 보리는 침착함을 유지하다가 장점인 힘을 이용하여 냉철하고 날카로운 한 방을 날리는 후방 공격형 선수를, 매켄로는 열정을 갖고 자신의 동물적인 감각을 활용하여 적극적이고 상대방을 압박하는 한 방을 날리는 전진 공격형 선수로 성장한 게 아닐까 싶다. 

드디어, 결승전에서 맞붙게 된 두 사람은 테니스 역사상 가장 치열한 세기의 매치를 펼친다. 세상 사람들은 이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는 기억될 테지만, 패배한 선수는 윔블던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 속에서 사라질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굴육도 보리와 매켄로의 경기와 삶을 절대로 지배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의 이면을 일반 사람들이 읽어낼 수 없는 부분까지 읽어내며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이미 존중하고 있었고, 그리고 오로지 본인들의 목숨과 같은 테니스 경기에 집중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승패가 갈린 뒤 두 사람 중 한 명은 잠깐 아쉬움 혹은 좌절감을 느껴겠지만, 윔블던 대회의 막이 내린 뒤 공항에서 만났을 때 서로 악수할 뿐만 아니라 존경심이 담긴 포옹을 하며 다음 대회에서도 치열하고 후회 없는 좋은 경기를 또다시 하기를 기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어제의 경쟁자이자 최선의 적이라는 관계를 뛰어넘어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보리 vs 매켄로>는 다른 스포츠 영화처럼 관객들이 클라이맥스에서 엄청난 전율과 박진감을 느끼게 만든다. 다만, <보리 vs 매켄로>만 갖고 있는 특별한 점은 클라이맥스의 전율과 박진감이 단순히 경기 그 자체와 카메라 무브먼트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결승전 전까지 진행되었던 경기에서 느낄 수 있는 스트로크 하나하나에 담긴 복잡한 사연과 감정이 차분하면서도 섬세하게 축적됨으로써 일어났다는 것이다. 기존 영화와 달리 전율과 짙은 여운을 동시에 느끼고 싶다면 <보리 vs 매켄로>에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