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과 순종은 답이 아니었음을, <디서비디언스>

2019. 8. 23. 12:55주목할 만한 시선

세바스찬 렐리오는 파블로 라라인 감독과 함께 칠레의 현대 영화사의 중심에 있는 감독이다. <글로리아> (2013)로 베를린국제영화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은 <판타스틱 우먼> (2017)으로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제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으로부터 동시에 인정을 받으며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비하면 <디서비디언스> (2017)는 상대적으로 아쉬운 작품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이 계속 다뤘던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보수적인 종교의 문제, 남성 중심 사회 속 여성의 위치 그리고 차별받는 성소수자의 상황을 복합적으로 엮어내고, 다양한 이슈가 혼재된 상황 속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동을 통해 '불복종'의 참된 의미에 접근함으로써 여전히 영화로 마음을 동요시킨다는 점은 명백하다.

다시 되살아는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

"인간은 천사의 순결함과 괴물의 욕망 사이에 걸쳐져 있습니다. 선택이란 신이 내린 영광이자 고통이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복잡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로닛(레이첼 와이즈)’의 아버지는 유대교 회당에서 위와 같은 연설을 한다. 그런 다음 뉴욕에서 사진 촬영 작업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넘어가 오프닝 시퀀스를 형성한다. 이를 토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회당에서 한 마지막 연설은 신도들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실은 그녀를 위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연설이 아버지로서 뉴욕으로 떠난 딸에게 연민 혹은 아쉬움을 전달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과거의 일을 잊고 화해하기 위함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영화는 뉴욕으로 떠난 ‘로닛’과 영국에 머무르는 ‘에스티(레이첼 맥아담스)’를 통해 친척을 포함한 전통적인 보수 유대교인들의 간섭 때문에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이어졌음을 알려준다. 

‘로닛’과 ‘에스티’는 어릴 적 서로 사랑했지만, 율법에 어긋난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압을 당하고 답답함을 느낀다. 근데, 이를 대응하는 방식이 상반되었다. ‘로닛’은 도망을 선택했다면, ‘에스티’는 유대교 사회에 순종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두 사람은 연락을 끊은 채 마음속 응어리를 잊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로닛’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답답함이 다시 발동하면서 그녀는 숨을 쉬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예를 들어, 그녀는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남자를 만나 성관계도 해볼뿐더러,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탄다. 그런데도 시간이 갈수록 심리적 억압은 그녀를 옥죈다. 결국 그녀는 답답함의 근원인 종교를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함을 영화는 특정 장면으로 이야기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답답함을 호소하는 그녀를 화면 중앙에 위치시킨 다음, 상의를 일부 찢자마자 보이는 종교적 상징이 담긴 목걸이를 클로즈업(close up) 해 보여줌으로써 본인을 억압하는 종교로부터 도망칠 게 아니라 마주하고 불복종해야 함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로닛’과 달리 ‘에스티’는 영국에 남아 유대교 사회에 어울리기로 노력한다. 스승의 자리와 영예를 이어받을 ‘도비드(알렉산드로 니볼라)’와 결혼할 뿐만 아니라, 유대교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그녀는 자신을 억압하는 종교에 복종한다. 특히, 영화는 ‘가발’을 미장센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녀가 종교에 순종하고 있는 상황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에스티’ 역시 본인이 과거에 내린 선택이 답답함을 소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마음 한편에 불복종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자리 잡혔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원로와 친척이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윗사람들이 ‘로닛’에게 우스갯소리를 하자, ‘에스티’는 “여자들을 매일 이름이 바뀌잖아요. 남편 성을 따르면서 자신의 과거가 사라지죠. 안 그래요?”라고 대화에 끼어들며 난처해진 ‘로닛’을 도와주는 동시에 가부장적 요소가 섞인 종교의 구속에 저항한다. 

보수성에 묶인 여성

전통적인 보수 유대교인의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여성은 남성의 말을 들어야만 한다. '로닛'은 자신을 억압하는 종교와 사회가 싫어서 뉴욕으로 도망쳤지만,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영국으로 돌아왔다. '로닛'을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이웃은 그녀의 성적 성향을 알고 있음에도 남성과의 결혼을 강권할 뿐만 아니라, 유독 여성에게만 엄격하게 적용되는 규율 때문에 '로닛'은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나 몰래 담배를 피운다. 사실 보수성에 묶인 여성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에스티'다. 종교가 바라는 여성의 모습을 따르기 위해 '에스티'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혹은 외출할 때 무조건 가발을 써야만 한다. 게다가, 그녀는 남편 '도비드'를 존대해야 할 의무가 있을뿐더러, 율법에 규정한 시기에 따라 정기적으로 잠자리를 가져 출산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런데, 남녀 간의 위계적 질서는 종교적인 논의가 이뤄지는 장소에서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은 유대교 회당에서 진행된다. 오프닝에서 '로닛'의 아버지가 설교하는 모습과 엔딩에서 '도비드'가 추도사를 읽기 전 스승의 마지막 설교를 상기시키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면, 남성은 반드시 교단과 가까운 1층 자리에 앉는 반면, 여성은 예외 없이 교단에서 멀리 떨어진 2층 좌석에 착석한다. 이는 내부 구조가 만들어낸 미장센을 통해 남녀 차별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덧붙여 '도비드'를 포함한 원로들이 스승의 장례식에 읽을 추도사를 작업할 때 사무실에는 단 한 명의 여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특정 장소에서 철저히 제외함으로써 여성의 참여를 가로막고, 여성의 의견을 묵살해버린다. 

이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보수 유대교인의 사회는 여성을 보수성에 묶기 위해 교육을 수단으로 삼는다. 여자 학생들로만 구성된 학급에서 '에스티'는 수업을 진행하는데, 종교적인 주제가 담긴 텍스트가 주로 활용된다. 학생들은 '에스티'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생각에 대한 교사 피드백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들이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암기한 내용을 체화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계몽이 아닌 세뇌의 도구로 타락했으며 여자 학생들은 본인들이 체화한 내용에 담긴 여성으로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무의식적으로 새긴다. 

늦었기에 무엇보다 의미 있는 불복종(Disobedience)

'에스티'와 '로닛'은 첫 키스를 한 장소에서 추억에 잠겼다가 밤에 몰래 키스하다가 이웃 사람에게 걸린다. 순간적인 본능에 이끌려 한 행동에 후회와 불안을 느낀 '에스티'는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며 일종의 정화(purification) 의식을 치른다. 그리고 '도비드'가 자신을 걱정해서 화장실에 들어오자 '에스티'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의 품에 안긴다. 다음날 '에스티'는 분명 스승의 자리와 영예를 이을 '도비드'를 위해 '로닛'과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과거와 달리 그녀는 자신의 자유와 감정을 스스로 내리누르지 않고 '로닛'을 따라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감시로부터 해방된 두 사람은 격정적으로 육체적인 관계를 갖고, 이와 동시에 두 사람의 감정을 청각적으로 표현한 음악 선율은 계속해서 고조되다가 서서히 저조되면서 이들의 내면이 안정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간접적으로 알린다. 

늦게 귀가한 '에스티'를 본 '도비드'는 그녀를 의심하고, 결국 그녀는 그에게 자백한다. 상황이 악화되자 '로닛'은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당장 뉴욕으로 돌아가겠다며 집을 나서고, '에스티'는 '도비드'가 모르게 조용히 어디론가 사라진다. '도비드'의 연락을 받고 걱정이 된 '로닛'은 급하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사이 '에스티'도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복귀한 '에스티'는 '도비드'에게 앞으로 주변의 감시와 교리에 따라 살지 않겠다는 불복종을 선언한다. 이때 무엇을 위해 그녀가 불복종을 선언한 것인지 관객은 궁금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단순히 사랑 때문에 불복종을 표명했다면 이 영화가 다양한 이슈를 엮어내기 위한 노력이 수포로 되고 불행하게도 단순한 로맨스 영화에 그치기 때문이다. 

근데, '에스티'는 '로닛'과의 사랑이 아닌, 그렇다고 해서 본인의 자유가 아닌, 태어날 아이의 자유를 위해 결심했다. 본인의 현재 삶을 희생하더라도 '에스티'는 종교와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으로 인한 고통과 답답함을 후세가 답습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은 것이다. '로닛' 또한 '에스티'의 결심에 힘을 더해주기 위해 함께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번복한다. 두 사람의 태도에 고뇌에 빠진 '도비드'는 장례식 직전까지 깊은 생각에 잠긴다.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은 그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회당 입장부터 말을 마칠 때까지 핸드헬드 카메라로 촬영한다. '도비드'는 추도문을 읽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스승이 임종하기 전에 하셨던 설교를 상기시킨다. 장례식에 참석한 교도들은 그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오직 '로닛'과 '에스티'만 그의 의도를 파악한다. 

"마지막 설교로 이걸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우리에겐 신택의 자유가 있다'. 여러분은 자유예요"

'도비드'는 그동안 고뇌에 빠지면서 스승의 마지막 설교의 의미를 계속 되짚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까지 신이 내린 영광이자 고통인 선택으로 복잡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을 종교로 구원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뒤늦게 설교의 의도를 깨달은 그는 2층에 착석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불복종을 선택한 이들을 더 이상 어떤 기준에도 구속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도망과 순종을 선택했기에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지만, 이제라도 자유를 위한 불복종을 선택하며 웃으면서 헤어진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로닛'의 카메라다. 이전까지 그녀의 카메라는 답답함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도구에 그쳤다. 그러나 그녀는 '도비드'의 입으로 대신 전해 들은 아버지의 설교를 이해했고, 본인이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이 세상에서 사라졌음을 느끼게 해 준 묘지에 재방문한다. 카메라를 들어 아버지의 묘지를 찍음으로써 '로닛'은 아버지를 용서했으며 카메라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닌 그녀의 자유로워진 시각을 대변하는 도구로 전환된다. 

긴 시간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도비드'가 '로닛'과 '에스티'를 놓아줬다고 해도, 두 사람이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관문은 많다. 하지만, 두 사람이 더 이상 사회와 종교의 탄압으로부터 물러서지 않고, 당장의 사랑이 아닌 미래의 자유를 위해 불복종을 선택했기 때문에 삶을 살아갈 동력과 희망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디서비디언스>는 종교적 테마 중 하나인 구원을 반종교적 행동인 불복종으로 다룬 새로운 시각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