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거둘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는 사회, <내 발 아래>

2019. 10. 11. 17:45주목할 만한 시선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이자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새로운 물결 섹션 상영작인 마리 크류처 감독의 영화 <내 발 아래> (2019)는 개인적인 상황이 사회의 지배적인 의식 체계와 부딪히면서 당사자가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그리고 이후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한 개인이 사회가 보내는 무언의 압박 때문에 자기 욕망과 비밀을 숨길 수밖에 없게 되면서 들어서게 된 불안정성의 단계와 그 후 단계를 특징적인 장면 배열, 숏의 지속시간에 변화를 주는 편집, 그리고 일부 인물과 관련된 설정을 활용해 감독이 목격한 여성이자 성 소수자로서의 삶을 영화적으로 이야기한다. 

‘롤라(발레리 파흐너)’는 본인 발 아래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인물로, 자기 자신을 대면하지도 못하는 시간의 연속을 살아간다. 외부인의 시선, 특히 구걸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욕설을 퍼붓는 노숙인의 시선에서 롤라는 남성들이 판치는 경쟁 사회에서 밀리지 않고 성공 가도를 달리는 인물이다. 그러나 롤라는 사실 본인이 처한 상황과 숨겨야 하는 비밀이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충돌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으며 작은 외력에 의해 쉽게 평형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롤라는 성 소수자이며, 언니 ‘코니(피아 하이어제거)’는 편집적 조현병 환자다. 지배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성 소수자는 혐오와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대상이고, 편집적 조현병과 같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성장배경을 무시당한 채 정상성의 원리에 따라 비정상성으로 분류된다. 본인이 레즈비언이고 언니가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남성 중심 경쟁사회와 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배척되므로 롤라는 두 사실을 은폐하는 동시에 들킬까 봐 불안해한다. 마리 크류처 감독은 이와 같은 심리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거친 화면 질감과 헤드룸 및 아이룸이 적은 숏을 활용한다. 또한, 롤라가 회사 밖에 있을 경우 정적인 이미지를 철저히 배제하고 도로 위를 달리거나 쉴 새 없이 스핀 바이크를 타는 등 흔들리는 이미지만 고수함으로써 불안 심리가 직장 내에서 일상생활로 전이되었음을 시각적으로 나타낸다.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인에게 불리한 요소들을 숨기는데 애를 쓰던 롤라에게서 점차 이상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언니 코니가 병원에 입원한 후 롤라에게 전화가 지속해서 걸려온다. 언니의 목소리였기에 롤라는 언니가 병원에 요청해서 한 전화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하자 순식간에 롤라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 정체불명의 전화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걸려와 롤라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읊으며 그녀를 구석에 몬다. 이 순간부터 어디까지 실제로 발생한 사건인지, 그리고 현재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언니 코니가 아니라 롤라가 아니냐는 혼란을 야기하며 이전까지 축적한 숏의 층위를 한 번에 무너뜨린다. 더 나아가, 그 후에 갑자기 놀라며 잠에서 깨는 롤라의 모습을 담아낸 숏을 중간중간 삽입해 숏의 연결성을 거부하며 이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이와 동시에 이런 현상이 펼쳐지는 게 무언가를 계속 숨겨야 한다는 불안과 압박감에서 기인한 게 아니냐는 가설을 형성하게 만든다. 만약, 이 가설이 옳다면, 중반부부터 지속시간이 짧은 숏의 활용 빈도가 증가했다는 점과 후반부에서 애인 ‘엘리즈(마비 회르비거)’로부터 성관계를 거부당하는 상황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 지속시간이 짧은 숏을 더 많이 배치함으로써 롤라의 위치 전환을 빠르게 가져갔으며, 후자의 경우 언니의 비밀을 알고 난 후 롤라와의 성관계를 거부한 애인과 분노감을 느끼는 롤라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 아래 소수자 겪는 고통을 묘사한다. 따라서 제시한 가설과 두 가지 특성을 결합해 본다면, 롤라가 지금까지 억눌렀던 욕구와 본능이 극한점에 점점 더 가까이 도달하면서 결국 폭발이 임박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결말은 롤라의 두 가지 표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버즈 아이 뷰와 클로즈업이 혼합된 숏에 담긴 피폐하고 흐리멍덩한 표정, 또 다른 하나는 피폐한 모습에서 회복한 평범한 표정이다. 두 표정만 놓고 보면 맥락상 롤라가 한계점에 도달해 폭발한 후 쇠해졌다가 외부 시선 때문에 자기 자신을 대면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에서 벗어나 영혼을 치유한 듯해 보인다. 하지만, 영화에서 인용된 구절처럼 롤라는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시간, 즉 새벽의 시간을 맞이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물론, 영화는 열린 결말 형식을 갖췄지만, 병상에 누웠던 롤라가 일상생활로 복귀한 후 숏에 사용된 빛에 초점을 둔다면 적어도 긍정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기 어려울 테다. 아름답다고 말하기에는 과도하게 휘황찬란한 수많은 빛은 외부적으로는 빛이 롤라를 에워싸는 듯해 보이고, 내부적으로는 롤라가 신체에서 뿜어내는 빛처럼 보인다.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살펴볼 수 있지만, 양자 모두 부정적인 해석으로 귀결된다. 전자에서 보면 과도하게 휘황찬란한 빛이 롤라를 둘러싸며 그녀가 침착해질 수 있는 시간으로 가는 길을 봉쇄한 것으로, 후자에서 보면 억압되었던 욕구와 본능이 한계점을 뚫고 터지면서 나온 에너지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빛으로 발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로 결말에서 롤라의 외관상 표정은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쓴 또 다른 가면일 가능성이 있다.